월간 문익환_<시 속의 인물>

김세진 열사 (2024년 4월호)

[늦봄과 ‘이 사람’] 시 속의 등장인물로 살펴본 인물 현대사

“김세진 
그대만이 진실이어라
죽어서 사는 진실이어라”

 
  
◇ 김세진 열사
 

1986년 5월 6일 늦봄은 서울대에서 열린 김세진 열사 ‘민족장’에 참석하여 조사를 낭독했다. 시 형식으로 되었던 조사는 그해 12월 발행된 『죽음을 살자-문익환 선집』에 ‘당신과 함께 죽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다.

 

전방 입소 반대 시위에서 분신

서울대 자연대 학생회장이던 김세진은 86년 4월 28일 신림사거리 부근에서 전방 입소 교육 반대 시위 도중 정치학과 이재호와 함께 분신했다. 두 사람은 시위를 이끌며 ‘양키의 용병 교육 전방 입소 결사반대’를 외쳤고, 경찰에 대해서는 폭력진압 중지를 요구했다. 이를 무시하고 경찰이 강경 대응해 오자 결국 분신하기에 이르렀다. 김세진은 5월 3일, 이재호는 5월 26일 숨을 거두고 말았다.

5월 6일 민족장 참석 후 5월 20일에 늦봄은 다시 서울대에서 강연하게 되었다. 강연 도중 이동수 군이 분신 투신하면서 분신 배후로 의심 받았고, 자진하여 경찰에 출석했으나 곧바로 구속되었다.

 

늦봄, “모든 외세 거부하겠다” 약속

어린 학생들의 분신은 늦봄에게 큰 충격이었다. 김세진의 민족장 조사에서 늦봄은 ”‘죽어서 사는’ 열사 앞에서 엎드려 아뢴다”며 “당신과 함께 죽어 함께 살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천명했다. 모든 외세 및 외세 의존과, 독재와 부패와 분단과, 맹랑한 분단 논리를 온몸으로 거부할 것이라 약속했다. 또한 “육천만 겨레의 자유를 온몸 으스러지게 밀어 올리겠다”며 “분단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를 피 쏟으며 밀어 올리겠다”고 약속했다. 옥죄어 들어오는 모든 외세와, 외세에 의존하고 굴종하는 세력을 거부하겠다는 늦봄의 의지는 장렬한 분신을 택한 김세진의 뜻 그대로였다.

80년 군부 독재 세력의 광주 민중 학살을 목격한 이들에게 미국은 더 이상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자가 아니었다. 미국이 광주 학살을 묵인 내지 방조했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그에 따라 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 85년 서울 미문화원 점거 등 미국을 향한 공격이 이어졌다. 86년이 되자 본격적인 반미운동이 시작되어 ‘미제국주의를 몰아내자’는 구호와 함께 팀스피릿 훈련 반대와 핵무기 철수 등을 요구하게 되었다.

 

‘전방 입소는 미제 용병 교육’ 규정

학생들은 “전방 입소 훈련은 미 제국주의의 대학생들에 대한 용병 교육이며 식민지 노예 교육”으로 규정하고 4월부터 입소 반대 시위와 농성을 시작했다. 서울대 학생들도 4월 28일부터 5월 3일까지의 전방 입소를 거부하며 26일 중앙도서관 점거 농성을 계획했으나 불발되었다. 이어 27일 의대 도서관 농성 계획도 실패하자 28일 신림사거리에서 농성 시위를 전개한 것이었다. 일련의 과정에서 시위를 책임진 김세진과 이재호는 경찰의 폭력 진압에 대응하다 장렬한 죽음을 맞았다.
 
 
◇ 박용길 장로가 참석한 김세진 열사 묘소에서의 100일 추도 예배 
 
 

“얼마나 슬펐으면 그렇게 장렬하게 갔겠어요”

학생들의 시위와 김세진 분신의 근원에는 80년 광주의 비극이 있었다. 광주 민중항쟁의 진실을 알게 된 80년대 대학생들은 광주가 겪은 엄청난 아픔을 자신의 가슴에 부둥켜 안고 지냈다. 김세진이 품었을 그 마음을 늦봄은 ‘슬픔’이라는 말에 담았다.
 
세진이 어머니의 눈도 늘 웃는 눈이었을 텐데, 그 눈에는 늘 슬픔이 서려 있습니다. 그 슬픔은 아들의 슬픔이겠지요. 얼마나 슬펐으면 그렇게 장렬하게 갔겠어요? 그 가슴 미어지는 슬픔, 아들의 슬픔이 어찌 어머니의 슬픔이 되지 않겠습니까? (문익환 옥중편지 1990. 2. 9) 

세진 어머니의 눈에 비친 슬픔을 말하는 중에 아들 세진이가 지녔을, 깊이를 알 수 없는 그 슬픔을, 늦봄이 가슴 아리며 느꼈을 것으로 추측해 본다. 그 슬픔은 결국 다름 아닌 ‘광주 이천여 영령’들이 남긴 아픔이었다. 그 슬픔을 견딜 수 없었던 세진이와 학생들이 피 토하듯 외친 목소리가 ‘군부 독재 타도, 양키 고홈, 용병 교육 전방 입소 반대’였다. 

 

늦봄, 학생들의 희생 막으려 방북 결심

늦봄은 이동수 군 분신 후 구속되어 14개월 만인 87년 7월 석방되었다. 이듬해 4월 ‘김세진 이재호 열사 추모사업회’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된 늦봄은 추모제 때마다 참석하여 그들을 기렸다. 박용길 장로는 세진의 어머니와 함께 늦봄의 옥중 면회를 함께 하는 등 가족과 가까이 지내며 열사의 명예 회복에 노력했고, 세진의 어머니 아버지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에 참여하는 등 민주화 운동에 힘을 보탰다.

86년 4~5월에 연속된 학생들의 분신은 늦봄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어린 학생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는 독재의 정당화에 이용되는 분단 현실을 극복하는 것이 시급함을 절감했고, 이때부터 통일의 길을 열기 위해 방북하겠다는 결심의 싹이 텄다.
  

세진이 재호가 간 지 벌써 4년이 되는군요. 암담했던 시절들을 회상하면서 부모님들께 위로할 길이 없군요 … 그래도 당신께서 다녀오신 후 이 비극을 막을 수 있었다는 것 참으로 흐뭇한 일입니다. 그것만으로도 감사를 주님께 드립니다.  (박용길 편지. 1990. 4. 25) 


<글: 조만석>

[참고문헌]
문익환 옥중 편지
김세진 이재호 기억저장소 🔗https://snumemory.org/
오픈아카이브 🔗오늘의 역사

 
◇통일의집 개관식에 참석한 김세진 열사 어머니(뒷줄 왼쪽) 
 
◇장준하 추모식에 앉은 김세진 열사 어머니, 장준하 선생 부인, 박용길, 계훈제(오른쪽부터) 
 
  
당신과 함께 죽어

문익환

김세진 열사여
나의 막내아들보다도 한창 나 어린
앞날이 구만리 같은 빛나는 눈길
서릿발 양심으로 이 암흑 찢어발기며
이 꽉 막힌 역사에서 불끈
솟아오르는 또 하나 뜨거운
불길이여
열 번 스무 번 죽었다 나도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이여
막아도 막아도 귀청 찢어지게 들려오는
정의의 노랫가락이여
죽어서 사는 승리의 깃발이여
온몸 무너지는 당신의 거룩한
이름 앞에서
우리는 발에서 신을 벗고
엎드려 아룁니다
 
님이여
우리는 당신과 함께 죽어
당신과 함께 살아가겠습니다
살아나 껑충껑충 뛰겠습니다
두 어깨 디밀어 밀어붙이겠습니다
온몸으로 거부하겠습니다
옥죄어 들어오는 모든 외세를
독재와 억압과 부패를
외세 의존과 굴종과 아첨을
분단을
분단을 정당화하는 맹랑한 논리를
온몸으로 거부하겠습니다
그리고 어기영차 밀어올리겠습니다
자유를, 육천만 겨레의 자유를
온몸 으스러지며 밀어 올리겠습니다
분단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를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자유를
여덟 시간 일하고 여덟 시간 자고
여덟 시간 책을 읽고 친구를 만나고
애기를 낳아서 기르는 자유를
목에서 피를 쏟으며 밀어 올리겠습니다
 
농민의 해방 근로자의 해방을 깔아뭉개는 자유는
속임수입니다
속임수는 어디까지나 속임수입니다
속임수는 역사를 이끌어 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당신과 함께 죽어 당신과 함께 살겠습니다
살아나 모든 속임수를 깔아 뭉개겠습니다
그리고 진실을 펴겠습니다
독재는 속임수입니다
민주주의만이 진실입니다 그러나
모든 민주주의가 진실인 것은 아닙니다
민중이 역사의 주인으로 복권되는
민중민주주의만이 진실입니다
민중민주주의만이 분단의 허구를 까발리고
민족의 통일을 이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민족을 통일하는 민중민주주의여
그대만이 진실이어라
김세진
그대만이 진실이어라
죽어서 사는 진실이어라
 
님이여
당신의 웃음을 보여 주소서
그날까지 우리는 웃을 수가 없습니다
당신의 얼굴에 웃음이 돌아올 날
당신의 어머니가 당신의 아버지가
당신의 벗들이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울음을 터뜨릴 날
하늘이 울고 땅이 울고
산천초목이 얼싸안고 목놓아 울 날
백두산 묘향산 금강산 설악산 지리산 한라산이
한꺼번에 큰 목소리로 울음을 터뜨릴 날
민족해방의 날이 이제
성큼 다가서는 게 이리도 가슴 아프게 보이는군요
 
님이여
우리 육천만의 글썽이는 님이여
 

월간 문익환_<시 속의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