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월간 문익환이 만난 사람>

문영미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이사(1) (2024년 4월호)

“젊은 세대에게 늦봄 알리는 게 숙제”

 
 
💌편집장의 커버스토리
“다음 생애엔 늦봄의 딸로 태어나고 싶어요.” 뜻밖의 말이었습니다. 늦봄의 조카이자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실무를 총괄하는 문영미 이사. 늦봄이 돌아가셨을 때를 회상하며 불쑥 끄집어낸 속내는 늦봄과 문영미 이사와의 관계를 한마디로 아우릅니다.
문익환 목사는 그녀의 삶에 커다란 중심축이었기 때문입니다. 큰아버지와 조카라는 혈연적 관계를 넘어서 늦봄은 그녀의 롤모델이었고, 존경하는 민주화운동의 대부였으며, 그녀가 일해온 삶의 현장에 늘 함께 했던 영웅이었으니까요.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의 오늘이 있기까지 하나에서 열까지 현장에서 발로 뛴 문 이사. “젊은 세대에게 늦봄 알리는 게 숙제”라는 그녀를 『월간 문익환』 시즌2 마지막호 주인공으로 만났습니다. 
 
 
◇통일의 집에 전시 중인 판화 작품을 배경으로 문익환 목사와의 기억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문영미 이사
 
 
통일의 집에서 2년이 조금 넘게 아키비스트로 일하며 만난 문영미 이사는 살짝 ‘사기캐’ 같았다. 동화를 쓰고, 개관전시를 위해 직접 스케치를 그리며, 마당 노동을 즐기고…무엇보다 사료에 해박하고 진심이다. 함께 일을 해봤다는 건 상대방의 면모 일부를 경험했다는 것인데 내가 본 그녀는 문익환 목사 조카라기 보다는, ‘생생하고 날 것 같은’ 늦봄 아카이브 현장의 선배였다. 

『월간 문익환』 시즌 2는 문익환 목사의 인간관계 속 사람들을 인터뷰해 왔다.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소개됐고 문익환 목사도 다시 들여다볼 수 있어 내심 흥미로웠다. 여기에 꼭 포함하고 싶은 사람이 바로, 문익환 목사의 기록을 보존하고 알리고자 애썼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문영미 이사가 들려준 늦봄 아카이브 그 시작의 이야기를 나누며 앞으로의 지향과 방법을 함께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글: 아키비스트 지노>
 
 

 문익환 목사에 관한 기억 

어릴 적 함께 자동차 타고 달나라 가던 꿈

▶큰아버지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기억은? 
어린시절 꾼 꿈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꿈 두 개가 있는데 이상하게 큰 아버지랑 관련된 꿈이더라구요. 하나는 큰아버지와 뚜껑 열린 자동차를 타고 우주를 거쳐 달나라로 갔는데 달나라에서 우리를 환영하고 솔방울을 선물로 준 거예요. 또 하나는 큰아버지가 나한테 휘파람 부는 법을 가르쳐주는 꿈이었어요. 
 
◇민주구국선언(1976. 3. 1) 수감자 가족 위로 모임에서 과일을 먹는 어린시절의 문영미 
 
 
제가 다녔던 한신초등학교가 그때 송암교회(한신대 근처) 있던 자리에 있었거든요. 그때는 한신대에서 여기로 오는 도로가 없고 국립재활원 앞 도로가 개천이었어요. 평소엔 물이 별로 없지만 여름에는 물이 막 넘쳐 나니까 가오리까지 걸어가서 삥 돌아서 와야 하는 건데 초등학교 2-3학년 때인가 나른한 이른 여름-늦봄 쯤에 혼자 약간은 모험 삼아 한적한 동네 길로 해서 놀러왔죠. 그때 큰 아버지가 집에 계셨는데 아마 성경 번역하고 계셨을 때가 아닐까 싶어요. 저기 저 안방에서 앉아 일하시면 저는 옆에서 그림도 그리고 평화롭고 한적한 때를 보냈던 기억이 남아 있어요.
  
 

현장에서 보면 낯선 느낌

▶운동 현장에서 만나면 어떠셨는지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라 제가 나서기 어려웠고 그때 큰아버지는 강연을 한다거나 투쟁의 현장이라 늘 긴장되고 격앙되신 상태셨어요. 어린 시절에 받았던 느낌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죠. 저는 인간 문익환으로 큰아버지를 알고 있지만 사람들 앞에서 보여주신 모습은 좀 낯설게 느껴질 수 있었던거 같아요. 

큰 강연을 앞두고 가택 연금을 당할 수 있어서 저희 집에 오셔서 주무시기도 했지요. 소파에서 정세를 분석한 운동권 자료 같은거 읽으시면서 아버지랑 이런저런 얘기하시고 그대로 주무시고 다음 날 강연하러 가시곤 했지요. 
 
 

둘 다 말띠, 남다른 인연 느껴

▶감옥 드나드는 늦봄을 보면서…
사람들은 대단하신 분으로 큰아버지를 봤지만 저는 하도 감옥에 많이 들락거리시니깐 안쓰러운 느낌이 많이 들었어요. 감옥에 면회 가면 그만 가셨으면 좋겠다는 생각 많이 했고 북한에 가셨을 때도 하도 사람들이 뭐라고 욕도 많이 하고 그래서 속상하기도 했지요. 사실 문익환 목사는 운동권 계파와는 무관했지만 북한 다녀온 후로 노동운동 탄압이 굉장히 거세지면서 본의 아니게 만들어지는 이미지가 있었던거 같아요. 

큰아버지와 저는 둘 다 말띠고 나이 차이가 손녀뻘에 가까울 정도라 저를 이뻐하셔서 큰아버지와 뭔가 남다른 인연이 있었나 싶어요. 돌아가셨을 때 다음 생애는 큰아버지와 딸과 아버지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죠. 성격이 불같고 예민하신 면도 있으시지만 굉장히 따뜻하고 사랑을 표현하시고 저를 품어주고 지지해주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주셔서 그런 마음이 들었던거 같아요.

(🔗문익환이 가족에게 보낸 편지 > 가족관계도에서 '문영미'를 선택하면 편지를 모아볼 수 있다.)  
  
 
◇ 큰아버지인 문익환 목사 내외와 부모인 문동환 목사내외와 함께 경기도 소요산에 있는 조부모 묘소를 참배한 문영미 이사. (1991. 4)
 

몸 안 사리고 감옥 드나드시니…

▶문 목사님에 관해 사람들이 품는 애틋한 마음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목사님 삶의 전반에 걸쳐서 열사들을 위해서 하셨던 일들, 계속 몸을 안 사리고 감옥에 드나들었던 삶들을 사람들이 다 봤으니깐 통일, 노동자, 농민 운동 하는거 보면서 감동을 받았지 않았나 싶고. 또 북에 가셨던 것도 시간이 흐르면서 재평가가 많이 되고 있는거 같아요. 6.15공동 선언도 있었고, 목사님과 4.2공동선언이 어떻게 보면 그것을 열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시간이 흘러 운동권 사람들도 본인들도 삶이 달라졌고 이제는 집단적으로 경직된 시기에서 좀 벗어날 수 있었고요. 또 6.15를 겪으면서 남북 간의 화해 움직임을 보면서 목사님이 북에 간 게 진짜 물꼬를 트는 행위였구나를 사람들이 많이 깨닫지 않았나 싶어요. 그러면서 목사님이 과거에 건강 상태라든가 쉬셔야 되는 상황에서도 장례위원장을 계속 맡으시면서 감옥에 들어가셨던 상황에 관해 안쓰러움과 미안함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당시 장례위원장 역할은 투쟁의 선봉 자리

그때는 워낙에 대치된 국면이었기 때문에 장례식은 그냥 얌전히 장례 치르는 게 아니라 싸우고 거리로 나가 투쟁하는 거였고 그때 사람들이 많이 죽기도 했었어요. 열사들이 계속 연달아서 돌아가셨던 시기라 국가에서도 굉장히 강경대응을 했고 그에 맞서 위원장을 한다는 건 투쟁의 제일 선봉에 선다는 거예요. 실제로 장례 행렬 같은 거 할 때 맨 앞에 가면서 최루탄 다 맞아가며 대치하고 싸워야 되는 거죠. 그런 걸 그 노인에게 또 부탁한 거였고 마다하지 않고 하셔서 감옥에 다시 가셨으니 정말 좀 그만하셨으면 좋겠다 생각했지요. 
  
 

감옥생활을 거치면서 성격도 변화

▶교수시절엔 깐깐하셨다는데… 
큰아버지가 사실 성격이 많이 달라지셨다고 생각돼요. 교수 시절에는 깐깐하고 엄청 예민하고 원칙적이신 분이셨는데, 할머니(문익환 모친) 말로는 감옥 갔다 와서 많이 달라졌다고도 하시고 외할아버지 성격도 불같으셨다는데 그걸 닮았다는 말씀도 하셨어요. 하지만 문익환 목사님은 그런 이면에 엄청난 사람들을 향한 따뜻한 정과 사랑, 그걸 표현하시는 면도 있었던 거죠. 식구들 말로는 굉장히 내향적인 사람인데 노력을 많이 해서 이렇게 되신것 같다고 얘기하더라구요. 
 
박용길 장로님은 굉장히 무던하고 변함없는 성격에 낙천적이셔서 농성장 같은 데서도 막 싸우다가 불편한 데서 잠도 잘 주무시고 그랬어요. 그러니깐 목사님의 그런 성품을 다 받아내시고 서로 보완이 되지 않았나 싶죠. 또 장로님은 목사님의 섬세하고 예술가적인 것도 굉장히 동경하셨던거 같구요.  
 
 
문영미 이사는 목사님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도 귀띔해 주셨다. 그러면서 정치적인 시련과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그런 성격들이 많이 극복이 되고 우리가 아는 인간적이고 따뜻한 사람 문익환이 나타나게 된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전해 주셨다.
  
▶주소록 때문에!
두 분이 주소록 때문에 싸우셨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전화기 옆 벽에 한장으로 만들어 딱 붙여놓고 사용하셨는데 목사님이 순서대로 수첩 같은데 안하고 왜 저렇게 크게 하냐고 그거 가지고 싸웠대요. 그건 장로님의 방식이잖아요. 체계적이진 않지만 한눈에 딱 직관적으로 들어오는. 장로님은 몇년마다 한번씩 다시 정리해서 쓰시곤 했죠. 
 
◇박용길 장로가 정리하고 사용한 지인들 전화번호
 
 ▶때로는 부모님과도!
화장실이 원래 두 개로 나눠져 있다가 하나로 됐는데 그 과정에서 어머니 아버지와 크게 다투셨대요. 식구들이 많으니까 두 개로 나눠져서 화장실하고 목욕탕이 분리돼 있는게 현실적으로 낫잖아요. 근데 문익환 목사님이 미국 갔다 오시면서 욕실하고 같이 좀 넓게 트여있는 걸 보시고 그렇게 하고 싶으셨나 봐요. 그래서 트겠다 그러는데 할머니랑 할아버지는 그러면 너무 붐비고 안된다 그래서 그거 가지고 많이 대립했었다고 하더라구요. 
  

[(2)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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