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특별 좌담>
청년 이사 3인에게 늦봄을 묻다(1) (2025년 4월호)
‘우리도 늦봄처럼’ 현장에 뛰어든 젊은 청년들
💌 편집장의 커버스토리
‘과거가 현재를 돌보고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살리는’ 기막힌 역사가 두 시대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38년 전인 1987년 6월. 청년들이 항쟁의 중심에 섰습니다. 그들은 전두환 군사정권을 규탄하며 온몸으로 독재와 맞서 싸웠습니다. 네 번째 수감된 진주교도소에서 나온 늦봄은 지체없이 그들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2025년 4월. 또다시 청년들이 광장에 섰습니다. 그들은 대통령 탄핵을 외치며 응원봉을 높이 들고 ‘다시 만난 세계’을 외쳤습니다. 늦봄을 닮은 청년들이 망설임 없이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시대는 달랐지만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청년들의 마음만은 하나였습니다.
“역사는 꿈을 통해 부활한다”던 늘 푸른 청년 문익환 목사. 그는 떠났지만 그의 곁엔 그를 닮은 청년들이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청년들에게 늦봄은 어떤 의미일까요?
◇지난 4월 1일 거리 집회 참가 후 안국역 인근 카페에 모인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청년 이사 세 명.
(왼쪽부터 송예인, 이한솔 , 이윤재 이사)
작년 초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는 이사진을 함께 꾸려갈 청년 3인을 섭외했다. 평화통일을 논하는 시민사회 장에서 점점 줄어드는 청년의 목소리를 더욱 선명하게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청년의 고민과 생각을 나누고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어떻게 통일이라는 주제를 이어 나갈지, 문익환을 어떻게 기억할지, 그 해답의 실마리를 얻고자 함이었다. 어느덧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탄핵정국을 맞아 역사의 주역으로 다시 등장한 젊은 청년세대들. 그들이 말하는 문익환과 통일을 직접 듣고 싶었다. 지난 4월 1일, 윤석열 파면 선고 3일 전 안국역 근처에서 이들을 만났다. 계엄의 후폭풍 속 탄핵 정국의 한복판에 있던 세 명의 이사. 늦은 시간까지 집회에 참여하다 만난 이사들 사이에는 또래들의 끈끈함이 있었다. <글: 기림>
▶어떻게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의 이사가 됐나
늦봄학교 졸업생으로 “무엇이든 하겠다” 약속
▲송예인(이하 예인): 통일의집과는 예전부터 인연이 깊었습니다. 박용길 장로님 살아계실 때는 통일의집에도 자주 갔어요. 점심식사를 함께하러 가기도 했고요. 음, 맨 처음에는 이사가 되는 줄 몰랐어요. 통일의집에 청년이 필요한데, 와달라는 연락을 먼저 받았죠. 그래서 ‘네, 물론이죠’ 하고 답변드렸고. 늦봄문익환학교 졸업생으로서 사업회에 무언가 이바지할 수 있다는 게 영광이었습니다. 그 뒤에 이사진으로 들어와 달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저도 단체에서 일하는데 이사라고 하면 몇십 년 동안 필드에서 경력이 있어야 하는 그런 인식이 있다 보니까 초반엔 되게 어렵게 느껴졌어요. 그런데 제가 예전에 문영금 관장님이랑 통일의집에서 부탁하는 건 뭐든 하겠다 약속을 했었거든요. 그래서 이사라고 했을 땐 솔직히 조금 놀랐지만, 기꺼이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영화 ‘동주’-‘1987’ 통해 목사님 알게 돼
▲이윤재(이하 윤재): 제가 처음 이사로 들어오기 전만 해도 아직 진천에서 서울에 왔다 갔다 하던 때였어요. 어느 날 김병민 이사님이 전화를 주셨는데 문익환기념사업회라는 곳이 있는데 문익환 목사님을 아냐? 이렇게 질문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안다 말씀을 드렸죠. 제가 영화 동주나 1987에서 문익환 목사님을 봤거든요. 그랬더니 김병민 이사님이 저한테 이사회에 합류가 가능하겠냐고 물어보셨어요. 김병민 이사님께서 거리 때문에 제가 힘들지 않겠느냐 걱정을 해주시긴 했지만 저는 제 지역 있는 데서 청년 활동을 해서 서울에 왔다 갔다 하는 게 그래도 좀 익숙한 사람인지라 괜찮았습니다. 그래서 해보겠다 말씀을 드렸죠. 저를 김병민 이사님이 좋게 봐주시고 이사로 추천해 주셔서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강풀 만화 보고 늦봄 처음 알게 돼
▲이한솔(이하 한솔): 문익환 목사님은 강풀 만화에서 처음 알게 되었어요. 중학교 때인가 그때 처음 알게 되었고, 수능 공부할 때는 잊었다가 대학 와서 다시 마주했습니다. 학생 운동은 끝났지만 그래도 학생회가 어느 정도 남아 있던 시기에 대학 시절을 보냈어요. 제가 다녔던 대학은 통일을 우선시하는 의제를 가지고 있던 학생회가 오래 집권해서 관련 자료가 학생회실에 많이 남아있었어요. 거기서 또 문익환 목사님을 떠올리게 되었죠. 그러다가 2023년에 송경용 이사장님께 연락을 받아 늦봄30주기 추진위원으로 먼저 합류했었는데요. 그때 30주기 활동을 하다가 사무국에서 섭외 연락을 받았고 그렇게 이사가 되었습니다. 합류 당시 고민이 없진 않았지만, 통일에 대한 문제의식이 많이 사라지는 시점에 이걸 계기로 문제의식을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사로서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나
사업회에서 내 자리 잡아가고자 노력
▲한솔 : 제가 내년이면 만 35살이 넘습니다. 이사회 때 청년이라고 저를 소개해 주시는데 사실 그 역할을 제가 할 수 있을지 스스로도 기대하지 않고 약간 부담이긴 했습니다. 이제 곧 청년이 아니게 되니까요. 기념사업회에서 이사직을 시작하고 나서 오며가며 시민사회 어른들이 물어보시더라고요. 어쩌다 여기서 이사직을 맡았냐? 라는 질문인데 그 질문에 이면에는 너도 통일 쪽에 관심이 있었니? 너 바쁜데 거기서 잘할 수 있겠냐? 그런 맥락이 있긴 해요. 저도 여기에 대답하고 싶은데 제가 이사를 자임할 정도인가, 그 정체성을 내가 가지고 있느냐 하는 이면의 질문에 깔끔하게 대답하지는 못하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제가 이한열 기념사업회 이사도 맡고 있는데, 제가 거기 장학생 출신이고 이한열 열사 어머니와의 관계도 밀접했어요. 제가 이한열 열사랑 이름이 비슷해서 어머님이 좋아하셨어요. 그렇다 보니 제가 이한열 기념사업회 이사를 맡을 때는 내가 노동으로써 이 단체에 기여하겠다 하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럼, 배은심 어머니가 챙겨주셨던 역사에 대해서, 그 시간에 대해서 갚을 수도 있고. 그런 저만의 설득력이 있었는데 문익환 기념사업회에서는 스스로를 설득할 만한 명분을 아직 찾고 있는 기분이에요. 그래서 아직 기념사업회 내에서 스스로 어떻게 자리를 잡아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사들이 포지셔닝을 정확하게 하고 내가 이런 분야에서 이 단체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상호 확인하는 과정이 있었으면 해요. 그래도 최근에 늦봄통일상 심사위원으로 들어가게 되어서 내가 어느 정도는 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은 있다고 생각하게 되기도 했어요.
할 수 있는 건 다해야겠다는 생각
▲예인: 음, 제 역할에 대한 고민은. 저는 저의 포지셔닝을 ‘몸빵’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행사가 있으면 조금 일찍 가서 실무도 같이 하고. 한솔 이사님이 말씀하셨던 거처럼 저도 제가 금전적이나 사회적 네트워킹을 많이 지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다 배울 게 많은 이사분이신데 거기서 뭔가 뛰어난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냥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해야지 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국회에서 문익환 전시회 하고 싶어
▲윤재: 저도 한솔 이사님과 비슷한 고민을 가지고 있어요. 통일의집에 추천을 받았을 때는 되게 뭔가 많이 할 수도 있다고 얘기를 해주셨어요. 제가 지금 정치권에도 있지만 조금 걸쳐서 활동하는 게 많으니까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이사로 들어왔으면 뭔가 활동을 하고 해 드려야 하는데 이사회 참여 정도밖에 안 되는 거예요. 제가 가지고 있는 자원을 활용해서 무언가 했으면 좋겠는데 쉽지가 않더라구요. 시간이 잘 안 나는 것도 있고. 그래서 내가 진짜 뭘 도울 수 있을까 고민도 엄청 했어요. 지금까지 제가 해드린 건 지난번에 국회 오셨을 때 주차 등록해 드린 거? 그리고 솔직히 무슨 생각을 했냐면 국회에서 문익환 전시회 하는 거였어요, 토론회나요. 어떻게 한 번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월간 문익환_<특별 좌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