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지노의 기록이야기>
지구 반대편에서 온 편지, “힘을 내십시오” (2025년 5월호)
숨겨져 있던 기록, 새로운 의미를 찾다
◇Heleen Diepstra, 1990.
기록은 지금 여기, 우리에게 의미 있을 때 비로소 생명력을 갖는다. 그래서 기록을 발견하고 이해하고 연결하는 것이 중요하고, 기록은 의미 있는 관계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지노의 시즌 3, 새 코너는 아카이브숲 속 숨겨져 있던 기록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게 되었는지 그 후일담을 기록해보는 것이다. 어떻게 기록들이 지금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 되었는지를 돌이키다보면 앞으로 더 많은 기록들의 의미 있는 되살림도 가능하지 않을까.
엽서들의 여의도 나들이
12.3 계엄이 있기 불과 10여 일 전 늦봄문익환아카이브 소장 몇몇 엽서들이 여의도 나들이를 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나는 노란 엽서 한 장이 떠올랐고 아카이브 담당자인 에바를 찾아 뒷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나들이를 나선 엽서들은 1990년대 국제 앰네스티가 벌였던 ‘양심수에게 편지보내기 캠페인’의 일환으로 문익환에게 보내진 것들로 이번에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가 ‘국제인권 편지쓰기’ 전시를 하게 되어 참여하게 된 거였다.
그런데, 한국지부 사람들은 어떻게 이 엽서들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일까? 에바는 앰네스티 활동가가 국내 여러 유명인사들의 아카이브를 거치다가 온라인 늦봄아카이브에서 이 엽서들을 발견했다고 알려주었다. 그렇게 약 20점 정도의 엽서들은 2박 3일 행사를 위해 수장고를 나섰다.
◇늦봄기념사업회 페이스북에 소개된 “국회 인권 편지쓰기 전시” 소식
아카이브 백로그가 온라인 아카이브로 가기까지
1990년에 보낸 이 엽서를 내가 처음 본 건 2020년 경으로 당시 한신대 수장고 3층에 있던 박스들을 모두 열어보던 때였는데 보물찾기를 하면서도 기록의 의미와 맥락을 잘 몰라 헤매기도 했다. 이 엽서들도 미처 정리되지 못한 채 아카이브 박스 여러 곳에 흩어진 상태였으니 일명 백로그(backlog)였다. 백로그란 정리되지 않은 채 쌓여있는 기록들을 의미하는데 아카이브에서 기록관리 업무가 지체되는 현상을 암시하거나 해결해야 할 과제로서 다루어지는 존재라 할 수 있었다. 왜 이 엽서가 여기에 있게 된 건지 궁금해하면서도 유사한 엽서들이 나오는 족족 모으며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애썼던 기억이 남는다.
하지만 모아 놓은 엽서가 제대로 정리되고 이용자를 만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2021년 가을, 다른 우선순위 높은 일들에 밀려 이들에 대한 관심이 식어지던 찰나 엽서들의 정리와 서비스가 전격적으로 시작된 건 마침 미국 시애틀과 뉴저지에서 온 자원봉사자 두 명 덕분이었다.
미국 학생 자원봉사자 Grace와 Kate는 엽서들의 목록을 만들고 손글씨로 쓴 내용을 텍스트로 입력했을 뿐 아니라 스캔까지 마쳐 온라인 아카이브에 올려주었다. 이들 모두 겨우 아카이브에 6개월을 머물렀을 뿐이었지만 그들 덕분에 엽서들은 말끔하게 정리되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온 편지들”이라는 인상적인 제목과 함께 그들은 “세계 각국에서 보낸 힘을 내시라는 메시지가 꼭 하늘에서 문 목사님을 지켜보시는 주님(Him)을 뜻하는 것 같아 마음이 뭉클해진다”라는 소감도 남겨주었다. 때마침 아카이브에서 일했던 유서형 인턴이 이들을 주도했다.
그렇게 2022년 초에 온라인 늦봄아카이브에 탑재된 이 엽서가 이후 온라인에서 누구에게 얼마만큼 읽혔는지를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이후로도 국회 나들이를 나서기까지 3년은 족히 걸렸다는 사실이다.
◇엽서를 정리한 소감을 정리해 쓴 인턴일기, 2022.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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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우연과 손길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의미
이 엽서가 전시에 이르게 된 과정은 잊혔던 기록이 새로운 의미를 찾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모든 것의 시작은 당연히 기록의 존재부터다. 그리고 그것을 버리지 않고 간직해 온 가족들이다. 물론 그 후에도 수많은 우연과 노력이 필요했다. 처음 서비스 대상으로 엽서를 발굴해낸 아카이브 담당자, 엽서를 정리해 온라인 서비스를 할 수 있도록 기여한 자원봉사자들, 인터넷 아카이브를 탐색해 엽서를 찾아낸 앰네스티 전시 담당자, 이후의 소중한 손길들 덕분에 엽서는 새롭게 빛을 보게 되었다. 이 다양한 상호작용과 연결의 과정을 통해 엽서에는 새로운 의미가 더해졌다.
언제가 나는 그중 노란 엽서 한 장에게 위로를 받은 기억이 있다. 분명히 문익환 목사에게 보내는 위로의 메시지였지만 그걸 읽으며 나도 위로를 받았다. “힘을 내십시오” 라는 글귀를 읽고 받은 그날의 따스한 느낌을 지금도 기억한다. 미국으로 돌아간 자원봉사자들은 짧은 시간 머물다 간 한국의 작은 아카이브에서의 시간을 그리워하며 한국의 민주화운동가와 그들의 손길이 닿았을 엽서들을 떠올릴 것이다. 국회의원 회관에서 전시를 본 사람들에게 이 엽서는 어떤 의미를 전달해 주었을까. 수많은 손길과 우연들이, 잊혀진 한 장의 엽서를 오늘 여기로 이끌었다. 기록은 그렇게 다시 살아나고 지금도 누군가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가고 있을지 모른다.
<글: 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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