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늦봄의 말과 글>

바람직한 지도자상 (2025년 5월호)

“바람직한 지도자는 남을 섬기는 사람이다”

[늦봄의 말과 글] ‘섬김’ 그리고 ‘존중’
 
◇역대 대통령과 가깝게 지낸 늦봄. 왼쪽은 윤보선 전 대통령 자택을 찾은 문익환 목사. 오른쪽은 조성만 열사 장례식에 참석해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한 늦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국가 지도자의 자질은?

곧 새 대통령을 선출한다. 국민 대부분은 이미 투표할 후보를 정했을 법한 시점이다. 지금 상황에서 대통령의 자질이나 자격에 대한 근본적 질문은 지금 당장 별 효용이 없다. 그러나 이런 때가 아니면 대통령, 즉 국가 지도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볼 시간이 또 있겠는가 싶다.
1969년 10월, 늦봄은 『기독교 사상』의 요청으로 ‘바람직한 지도자상’이란 글을 게재했다. ‘바람직한’이라는 제한이 붙어있는 요청이었다. 당시의 정치 상황에 대응한 요청이었을 것이다. 군사정권이 독재자의 집권 연장을 위한 3선개헌을 밀어붙였고, 대학가의 데모와 야당의 반대를 무시한 채 9월14일 일요일 헌법 개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켜 10월 17일 국민투표를 앞둔 상태였으니 말이다.

늦봄은 글 첫머리에서, 자신의 세대가 지도자라는 말에 반발을 느끼는 세대임을 토로했다. ‘위대한 지도자’ 히틀러를 따르다가 망신당한 독일 국민을 봤고, 스탈린을 ‘위대한 영도자’라며 따르다 체면을 구긴 러시아 국민을, 또 군국주의 영도자로 인해 패망한 일본의 새 세대를 목격함으로써 갖게 된 생각이었다.

인도네시아 수카르노의 교도민주주의나 아랍공화국의 나세리즘 같은 것을 용납하지 않는 한국 국민이 자랑스럽지만, 대만의 장제스 총통을 이상적인 지도자인 양 찬양하는 소리가 들리면 그만 할 말이 없어진다고 한숨짓듯이 말했다. 3선개헌으로 박정희를 총통 같은 존재로 만들려는 정권을 에둘러 비판하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강력한 지도는 곧 강한 억압을 의미할 뿐임을 꼬집은 것이었다. 
 
백성의 눈을 가리고 입을 봉하고 창의를 짓밟는, 소위 강력한 지도자 아래서 백성의 생명은 시들어갈 뿐이다 (「바람직한 지도자상」)

 

바람직한 지도자는 남을 지도하는 사람이 아니다

늦봄은, 지도자라는 말이 가진 부정적 의미를 지적했다. 지도자와 피 지도자라는 그릇된 관계를 전제하고 있으며, 고자세와 저자세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지도한다는 개념을 강하게 부인하며, 바람직한 지도자를 세 가지 측면에서 정의 내렸다.
 
바람직한 지도자는 남을 지도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남을 섬기는 사람’이다
  그는 ‘남과 손발을 잘 맞추는 사람’이다
  그는 ‘백성에게서 슬기를 배우는 사람’이다
 
 

첫째, ‘남을 섬기는 사람’

 늦봄은 이를 구약 속의 인물을 통해 설명한다. 남을 섬기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모세도 종이었고 다윗도 종이었다. 두 사람은 하느님 야훼의 종으로, 야훼가 원하시는바, 곧 백성의 행복과 번영과 축복을 진정으로 이룩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들이야말로 백성을 진정 섬길 수 있는 사람이었다.
 
모세는 이집트에서 신음하는 동족에 대한 관심으로 이집트인 노동 감독을 돌로 쳐 죽인 후 미디안 광야로 도망친다. 실의에 빠진 채 40년을 사막에서 보내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의 소리가 저렇게 들려오지 않느냐? 에집트인들이 그들을 괴롭히는 모습이 환히 보이지 않느냐? 이제 너는 가야 한다… 나의 백성 이스라엘을 에집트에서 건져내어라(출 3:9~10). (「바람직한 지도자상」)

 모세는 하느님의 가슴에서 울려 나오는 동족의 아우성, 귀를 막을수록 더 크게 울려오는 그 아우성에 끌려 종이 되어 나설 수밖에 없었다.

다윗은, 짓밟혀 죽으면서도 찍소리 못하는 과부와 고아와 서민 대중의 아픔을 자기 아픔으로 알고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해 주고 바라는 것을 할 수 있는, 그런 봉사자였다. 모세와 다윗은 늘 양심의 심판자 앞을 떠나지 않고 살았기에 자기의 마음을 백성에게 강요하지 않는 참된 봉사자가 될 수 있었다.

 

둘째, ‘남과 손발을 잘 맞추는 사람’

‘남과 손발을 잘 맞추는 사람’을 설명하며 늦봄은 다윗의 행적과 인간성에 집중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여러 사람과 팀을 이루어 각자 자기 자리에서 맡은 일을 해 나가도록 이끌어 간, 팀 주장 유형의 첫 지도자가 다윗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다윗은 한때 강도떼의 두목이었지만 동지를 규합하고 부하를 자기 이상으로 사랑하고 힘을 길러 기회를 기다렸다. 그는 자기를 죽이려던 사울과 아들 조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에는 만인의 심금을 울리는 조가를 읊어 슬퍼해 준다. 반대편 사람들의 인심을 얻어 두기 위함이었다.

다윗은 남방 유다의 도시도 아니고 북방 이스라엘의 도시도 아닌 중간 지점의 도시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새 서울로 삼는다. 남과 북의 융화와 통일을 위해 폭넓고 멀리 보는 정치적 포석을 해 나갔다. 이것은 정치적 계산이 아니라, 폭넓고 여유 있는 다윗의 인간성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다윗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의리요 신의였다. 사랑하는 부하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고 우리야를 죽을 곳에 내몰아 전사하게 한 후 다윗은, 나단의 꾸지람을 듣고 용상에서 내려앉아 베개가 썩도록 통회의 눈물을 흘린다. 잠시 부하에 대한 의리를 짓밟았지만, 다윗은 양심의 아픔을 지니고 살아가는 인간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늦봄은, 정치적 계산으로 행동하는데 싫어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바람직한 지도자가 아니냐며, 다윗에게서 그런 면모를 찾았다.

 

셋째, ‘백성에게 슬기를 배우는 사람’

마지막으로, ‘백성에게 슬기를 배우는 사람’이란? 늦봄은 솔로몬과 아들 르호보암을 예로 든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 등의 속담 속에 담겨 있는 백성의 슬기는 동서고금을 통해 빛나는 생의 교훈이다. 솔로몬은 이런 주옥같은 백성의 속담에서 슬기를 배우며 철이 들었고 뼈가 굵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는 기막히게 멋진 임금이 되었다.

그러나 솔로몬도 ‘지나침은 모자람과 같다’는 슬기를 몰랐다. 화려한 건축을 세우고 거기에 도취하여 백성의 신음을 듣지 못했다. 그 후유증을 물려받은 아들 로호보암도 노인들의 지혜를 배워 행동하지 못하고 젊은 친구들의 야심과 욕망에 끌려 나라를 둘로 깨 먹고 말았다.
 
이사야는 바람직한 미래의 지도자 메시아는 슬기의 얼을 갖출 것이라고 한다(사 9:6-~7). 땅의 슬기가 하늘의 빛으로 빛날 때 사회의 앞길을 비추는 빛이 되는 것이다. (「바람직한 지도자상」)

 

바람직한 지도자는 남을 섬기며 존중하는 사람이다

이상과 같이 늦봄이 제시한 바람직한 지도자상을 살펴보았다. 남을 섬기고, 남과 손발을 맞추고, 백성에게 배우는 지도자. 한마디로 섬김의 지도자다. 섬김의 지도자는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인간성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바람직한 지도자를 이렇게도 규정지어 보고 싶다.

바람직한 지도자는 남을 지도하는 사람이 아니다.
바람직한 지도자는 남을 섬기며 존중하는 사람이다.

리더와 리더십에 대한 책과 강의가 넘쳐난다. 대표적인 리더십 이론으로 ‘서번트 리더십’이 있다. 부하 존중, 구성원에 대한 경청, 상대와의 공감 등이 주요 특징인 바, 바로 ‘섬김의 리더십’이다. 1970년 초 소개되었다.

늦봄은 이미 1969년에 ‘섬김의 지도자상’을 제시했다. 구약에 통달한 학자로서 1968년 4월 구약 번역에 참여한 지 1년 6개월 만의 글이고, 1969년 기고문으로는 거의 유일하다. 57년 전 글이지만, 국민이 폭력적 지도자를 파면한 것이 바로 어제 같은지라, 더 귀하게 읽어보게 되는 말씀이다.

<글: 조만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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