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의 커버스토리]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조성만 열사 어머니의 양말을 벗기고 발을 주물러 주시는 문익환 목사님을 생각합니다. 상대에 대한 최고의 존중이자 섬김입니다. 작은 섬김들이 한 올 한 올 이어져 아름다운 평화가 만들어집니다.
이주민들을 생각합니다.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익숙한 고향을 떠나 낯선 땅을 찾아온 그들. 하지만 우리와 그들 사이에 차별과 편견 그리고 오해의 강이 흐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그들의 발을 씻겨줄 수 있을까요?여기 ‘모두가 모두로부터 평화를 배운다’고 힘주어 말하는 젊은이가 있습니다.
‘피스모모’ 대표 문아영 이사. 피스모모는 ‘2025 늦봄 평화·통일 아카데미: 이주하는 사람, 그리고 연대’ 1강과 8강을 맡아 ‘일상 속 권력’과 ‘연대는 가능한가?’를 함께 고민합니다. 『월간 문익환』은 ‘2025 늦봄 평화·통일 아카데미 칼럼’ 코너를 통해 강의 내용을 소개할 예정입니다. 존중과 배려라는 작은 실천이 어떻게 가능한지 미리 들어봤습니다.
“모두는 모두로부터 평화를 배운다”
[2025 늦봄 평화·통일 아카데미 칼럼] 문아영 사)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이사, 사)피스모모 대표
※피스모모는 오는 5월 20일부터 7월5일까지 열리는 ‘2025 늦봄 평화·통일 아카데미(이주하는 사람 그리고 연대)’에서 1강 ‘일상 속 권력’과 8강 ‘연대는 가능한가’를 담당한다.
1년하고도 1개월 만에 다시 찾은 홍제동 피스모모 커먼스퀘어. 2024년 3월 한 달 매주 토요일 피스모모 평화교육 진행자 입문과정으로 피스모모를 찾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솟았다. 절로 겸손해지는 그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자 지난 1년 1개월 동안 있었던 수많은 사건, 사고가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한 발 한 발 언덕을 오르며 가쁜 숨도, 복잡한 머릿속도 차분하게 골라보았다. 어느새 피스모모가 있는 골목길에 도착했다. 환대라는 개념이 공간으로 형상화되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피스모모 커먼스퀘어. 세심한 손길이 구석구석 닿았음을 증명하듯 건강하게 자라나고 있는 여러 식물들, 고양이의 보금자리. 무엇보다 벨을 누르자 환하게 반겨주는 얼굴들. 그들의 반겨주는 미소가 빠르게 내 얼굴과 마음을 물들였다. 2023년 제25회 늦봄통일상을 계기로 2024년부터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는 피스모모와 연을 맺어 2024 청소년 늦봄 평화·통일 아카데미를 함께했다. 올해도 2025 늦봄 평화·통일 아카데미의 처음과 끝을 피스모모가 함께해주기로 했다. 따뜻함이 넘실대는 이 공간에서 피스모모의 대표이자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의 문아영 이사가 피스모모를 소개한다.
◇서울 홍제동에 위치한 피스모모 커먼스퀘어
모두가 모두로부터 평화를 배우는 곳
▲ 피스모모는 어떤 단체인가?
피스모모는 2012년 9월에 창립한 단체예요. 지금은 저희 창립 멤버가 된 동료 두 분에게 편지를 띄우면서 시작했어요. 그때는 이름을 평화교육 프로젝트 모모라고 불렀어요. 모모라는 작명은 제가 했는데 여기엔 두 개의 의미가 있어요. 하나는 ‘모두가 모두로부터 배운다’, 또 하나는 오늘 기림이 반납해 주신 미하일 엔데의 책 ‘모모’예요.
2012년부터 13년 동안 평화 주제로 ‘서로 배움’
당시에 평화교육 프로젝트라고 이름 붙였던 것은 한국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가 조금이라도 더 좋아지는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였어요. 이 프로젝트의 시작과 끝이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이 폭력적인 사회 안에서 평화에 대해서 계속 서로 배우는 프로젝트를 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단체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지만 초반엔 프로젝트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을 했던 것 같아요. 근데 이 프로젝트를 잘 운영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어떤 틀이 필요했고 그래서 저희가 비영리단체 포지션으로 시작을 한 게 2012년 9월이었어요. 첫 워크숍은 2013년 2월에 했었고요. 같은 해 3월부터 하나둘씩 워크숍을 하면서 이어진 게 지금까지 13년이네요. 벌써 13년 동안 평화를 주제로 ‘서로 배움’을 만들고 있습니다.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평화운동 시작한 계기
▲ “평화교육, 평화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모모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데에는 개인적 동기도 큰 부분이었던 것 같아요. 왜 한국에서 평화교육 단체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는가에 대한 답은 개인의 삶과 맞닿아 있을 수밖에 없어요. 내가 왜 피스모모를 만들자고 동료들에게 제안을 했을까 곰곰이 짚어봤거든요. 제가 지금 박사 과정을 하고 있고 논문 심사가 곧 있는데요. 그 논문을 쓰면서 새롭게, 새삼스럽게 알아차린 것들이 있어요.
저는 분단되어 있는 한반도 남쪽의 사회에서 태어나 살면서 전쟁의 공포를 많이 느끼며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유난히 심하게 무서워했어요. 전쟁이 날까 봐 늘 무서워서 제가 동생들 데리고 대피 훈련도 막 했어요. 어릴 때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같은 걸 안보회관 가서 견학하고. 그런 것들이 저를 너무 무섭게 한 거예요. 근데 그 불안이 사라졌는가 하면 사라지지 않았어요.
2010년에도 전쟁위기설이 있었어요. 천안함 사건 때인데, 북한이 했다 아니다 이러면서 남북관계가 얼어붙고 난리 났었죠. 그래서 피난하려면 자기나라로 오라고 해외 친구들이 엄청 연락을 줬어요. 근데 일상은 편안함에도 불구하고 제 안에서 되게 깊은 공포가 있는 거예요. ‘전쟁 나면 어떡하지?’, ‘진짜 날 것 같은데?’, ‘전쟁 나면 그냥 죽어야지 뭐’, ‘도망가야지’, ‘우리 엄마 아빠랑 동생들을 살리고 내가 죽어야지’. 그런 상상을 엄청나게 했어요. 그러다 어린시절부터 느낀 이 감정이 나 스스로 형성한 감각이라기보다 주입된 감정이었다는 걸 너무 많이 깨닫게 된 거예요. 이 공포도, 북에 계신 분들에 대한 저의 어떤 감정도, 선입견도. 이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고 정말 주입됐구나.
공적영역에서 교육이 어떻게 바뀌어야 할지 고민
어떤 경로로 주입된 걸까 살펴보다 보니 내 의식을 형성해 온 많은 부분에 국가가 너무 많은 영향을 미친 거예요. 그것도 공교육이라는 틀을 통해서. 지금 이 사회에서 보편 교육으로서의 공교육은 너무 중요한데. 그 공교육을 받는 사람들이 국가가 의도한 것들을 다 수용하지 않더라도 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잖아요. 그렇다면 공적 영역에서 교육이 어떻게 진행돼야 하지? 뭐가 바뀌어야 하지? 이제 이런 고민들이 되게 많았던 거예요.
그럴 때 전 직장에서 대훈(피스모모 창립멤버)을 만났고 평화학을 알게 되었어요. 또 거기서 만난 다른 교수님이 평화학을 공부해 보지 않겠냐고 물어보시면서 제가 평화라는 주제를 더 깊게 고민하고 꿈꾸게 된거죠. 그럼 공교육 문제를 파고들어야겠다. 제도를 바꾸는 일은 쉽지 않지만 탑다운(Top-down)식 교육만 가능한 건 아니다. 우리가 서로 만들어 나가는 배움의 공간에서 변화를 만들자. 이것들이 누적되면 사회 안에 천지개벽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더라도 스며들듯이 달라지는 것들이 있지 않을까? 그런 걸 꿈꾸면서 모모를 시작하게 됐어요. 모모가 지향하는 것이 결국은 분단을 계속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이탈하는 존재로서 탈분단 수행을 지향하는거죠. 이런 식으로 교육 과정을 만들게 되었어요. 그래서 모모가 생겨난 가장 큰 배경은 어떻게 보면 분단이라는 이유로 군사주의가 기본값이 된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 때문이겠죠.
◇피스모모 커먼스퀘어 마당에서 문아영 이사
각자의 삶에서 평화로 이어지는 걸 해보고 싶었다
▲ “피스모모는 기존 평화단체와 어떻게 다른가요?”
평화운동이라고 했을 때 떠올릴 수 있는 여러 스펙트럼이 있는데요. 저는 반(Anti)이라는 틀을 선호하지는 않아요. 평화는 반(Anti)보다 큰 거잖아요. 평화는 사실 굉장히 크고 소중하고, 전쟁같은 걸로 대립시킬 수 없는 개념이거든요. 근데 이제 반전(Anti War)으로 가게 되면 평화가 너무 협소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피스모모를 시작할 때 고민은 평화가 가지는 그 넓은 스펙트럼을 스펙트럼 그대로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였어요. 무지개는 일곱 색깔이 아니잖아요. 우리가 소화하기 위해서 일곱 빛깔로 축소시켜서 얘기하지만 사실 그 빛깔의 개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엄청난 스펙트럼이잖아요. 그래서 평화도 그럴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어떻게 조금씩 더 평화에 가까운 선택을 할 수 있을까?
평화는 일상에서 스며들듯이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한 존재가 매번 조금씩 더 평화에 가까운 선택을 할 수 있는가’가 모모의 관심사였어요. 그래서 저희는 교육을 화두로 잡았고 거기서 다른 평화 단체들이랑은 조금 구별점이 생겼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렇게 포지션을 잡았던 이유에는 ‘활동가는 어디서 만들어지는가’라는 질문도 있었어요. 왜냐하면 저는 활동가 경험이 없는 사람이었거든요. 저의 경우에 한국 현대사의 여러 가지 장면들이 저한테 영향을 주었지만 나는 활동가는 아닌데? 활동가가 평화를 위해서 필요하다면 그런 사람들은 어디서 만들어질까? 질문해 보았더니 잘 모르겠는 거예요.
예를 들어, 평화 단체가 캠페인을 펼치는 건 정말 중요하고 큰 의미가 있죠. 그런데 그 캠페인을 조직하는 사람들은 역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지만 그 캠페인에 반응해야 되는 사람들은 의도치 않게 수동화되는 구조가 있다고 생각되는 거예요. 하지만 모든 사람은 활동하는 존재잖아요.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활동하니까 활동가들이 그 활동이라는 말을 통해서 지향하는 바를 존중하면서도 모든 사람들이 각자 자기 삶에서의 활동을 하고 그것이 평화로 이어지는 그런 걸 해보고 싶은 게 모모의 욕심이자 야심이었죠. 그런 부분에서도 조금 구별점을 두게 됐던 것 같아요. 평화 의제의 언어를 배움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일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고 통역하는 걸 꿈꿨어요.
또, 70년대 80년대엔 한국에서도 평화교육을 하시는 분들이 생겨났는데요. 미국에서 회복적 생활 교육이나 갈등 해결 교육을 도입하셔서 공부 모임도 하시다가 90년대부터는 평화교육 단체를 표방하는 곳들이 생겨났어요. 대체로 개인간의 관계, 공동체에 포커스를 많이 맞추다 보니까 그 부분이 모모와는 조금 다르다고 느껴요. 모모는 국제정치적인 측면이나 국제관계, 전쟁의 문제, 그리고 무기 생산 등과 관련한 문제를 포괄하는 평화, 군사주의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는 평화를 얘기하려고 하고, 한국 맥락의 자생적인 평화교육을 하고 있는데 이런 점에서 다르지 않나 생각합니다.
나도 문 씨라서 유명한 문 씨 찾아보다 알게 돼
▲ “문익환 목사님을 알게된 계기 혹은 인연이 있나요?”
문 씨가 하나예요. 저는 족보를 믿지 않아요(웃음). 그렇지만 초등학교 때 수업에서 족보 이야기 하고 시조가 누군지 배우는 때가 있었어요. 저는 어쨌든 문익점 아들의 의안공파인가? 뭐 그런거래요. 그래서 호기심이 생겼던 게 그럼 문 씨면 다 친척인가? 그럼 문 씨는 누가있지? 하면서 막 찾아봤어요. 찾았더니만 문익점 말고는 유명한 사람도 별로 없는 것 같고. 근데 더 찾다 보니 문익환이라는 사람을 제가 우연히 알게 된 거예요. 그때가 90년대 후반, 제가 처음 인지를 하게 된 거죠. 뉴스에도 자꾸 나오시니까.
문 목사의 이한열 열사 조사 영상보며 일대일로 만나는 느낌
그리고 우리 아버지도 문 목사거든요(웃음). 근데 그 문 목사님은 뭔가 센 것 같고 막 넘나들고 하시더라구요. 이 목사님, 내가 생각한 목사님이랑 뭔가 되게 좀 달라. 어리니까 그때는 그냥 막연하게 북한에 갔다 온 사람 유명한 사람, 근데 정부에서 의심하는 사람 약간 이런 이미지 정도만 있었어요. 잘 몰랐죠. 근데 성장하면서 제가 민주화 과정에 대해서도 접하게 되고. 어릴 때의 마음이지만 저는 되게 부채감이 컸었어요. 민주화 운동 때 태어나지 않아서. 내가 그때 20대가 아니어서. 목숨 걸고 만든 민주 사회에 나는 그냥 무임승차 한다는 생각이 되게 많았어요. 그 고민 속에서 문익환 목사님의 책을 엄마 아빠 책장에서 한 권을 발견하고. 연세대에서 있었던 이한열 열사 조사 영상을 접했고. 그게 영상이지만 보면서 제 주변에 공기의 파동이 달라지는 걸 느꼈어요. 그때 문익환 목사님을 일대일로 만나는 것 같은 느낌을 처음 받았어요.
목사님은 스스로 역사에 휘말리기를 선택하신 분
그전까지는 맨날 빨갱이 목사라는 얘기도 많이 듣고. 대단한 사람 같긴 한데 뭔가 무서워, 잘 모르겠어. 저에게는 약간 그런 시선이었다가 민주화 운동과 문익환 목사님이 연결되었어요. 그리고 방북하셨을 때 그렇게 혼자 넘어가는 게 맞아? 이런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잖아요. 저도 그런 생각할 때 있었죠. 근데 넘어갔던 당시에 김일성 수령이 잘 맞아줬죠. 맞아줬을 때는 또 잘 맞아주는 이유가 있었을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어떤 시대의 혼돈 속에 계기를 만들기 위해서 빠르게 움직였던 매력적인 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죠. 내 친척이고(웃음).
역사의 격변 속에 그 격변과 무관하게 살 수도 있잖아요. 의도해서 그렇게 살 수도 있지만 그 격변과 연결되지 않아서 동막골처럼 전쟁 난 줄도 모르고 있다가 휘말리는 곳도 있고요. 근데 문익환 목사님은 휘말려 들어가게 되기도 했고 스스로 휘말리기를 선택하기도 하신 분이잖아요. 그런 것들이 저한테 어떤 영감을 주는 부분들이 많았어요. 그러다가 갑자기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에서 이사로 함께하자고 연락을 주시고 2023 늦봄통일상 때 수상단체 조각보의 축사를 부탁하셔서 연결되게 되었죠.
◇올해로 3년째 열리는 2025 늦봄 평화·통일 아카데미(재)바보의 나눔 후원).
2025년의 주제는 ‘이주하는 사람 그리고 연대’이다.
2025 늦봄 평화·통일 아카데미 ‘이주하는 사람 그리고 연대’
▲“2025 늦봄 평화·통일 아카데미 피스모모가 한 부분을 맡게 되었는데 어떠한 프로그램이 되었으면 좋겠는지?”
일단은 모모에게 시작과 끝을 맡겨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를 보면서 느끼는 건 그거예요. 과거에 매여 있을 수 있는데도 끊임없이 움직이는 단체인 것 같아요. 과거의 인물을 어떻게 재해석하는가가 과제일텐데. 문익환 목사님을 기념한다는 건 현재 문익환이라는 인물이 오늘의 맥락에서 어떤 의미인가? 하는 고민이 되게 많으실 것 같아요.
‘모든 사람은 이주자다’
그런 과정 속에서 올해 이주의 주제를 잡으신 것은 저는 너무나도 환영할 만한 주제 선정이지 않나 생각해요. ‘모든 사람은 이주자다’라고 하지만 사실 정주에 대한 어떤 환상이 있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정주하는 것을 지향하는 입장에서는 이주는 늘 낯선 존재고, 타자이고, 불편하고. 그리고 정주하고 있는 나에게 어떤 방해가 될까 경계하게 되고. 그렇게 내가 경계하는 타자라는 존재는 이분법적으로 선 긋기에 되게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평화의 문제를 고민할 때 우리가 누구를 배제하려고 하는가? 누구에게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는가? 우리가 이 삶을 살아가면서 어떤 존재에게 배타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 되게 촘촘하게 일상에 스며들어 있어서 알아차리기 어렵잖아요. 그런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경험하는 존재는 이주자들이지 않나 생각을 해요. 내가 다른 곳에 이주해 갔을 때 똑같이 경험하게 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시선을 여기서는 정주자의 입장에서 못 느끼는 거잖아요.
나 역시도 이주하는 존재로 스스로를 재발견해야
그래서 기대하는 것은 이주를 내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로 보지 않고 나 역시도 이주하는 존재로서 스스로를 재발견하는 것이에요. 모두가 이주하는 존재로서 서로를 바라보았을 때 이주라고 개념 지어진 이것을 어떻게 재해석할 것인가? 그 경계를 넘는다는 의미가 물리적인 경계뿐 아니라 우리 삶에 있는 수많은 경계를 넘나드는 것으로써 어떻게 의미화될 수 있을까? 그런 이야기를 시작과 끝에 나눌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자기 삶의 맥락과 아카데미의 경험이 연결되어서 나의 것으로 가지고 가실 수 있다면 너무 좋을 것 같아요. 또, 그러려면 배움의 시작에는 자기 얘기를 얼마나 털어놓을 수 있는가가 중요하잖아요. 그러니까 안전한 배움의 공간을 만드는 것에 최선을 다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 2024 늦봄 평화·통일 아카데미에서 쓴 피스모모 모드세팅카드 중 일부.
월간 문익환_<아카데미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