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현장 탐방>

파주 도라산역 ‘늦봄 시비를 찾아서’ (2025년 6월호)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피맺힌 목사님의 절규가 들렸다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그것은 글이 아니라 절규였습니다. 소리 없는 외침이자 아우성이었습니다. 수십 년을 저렇게 목청껏 토해내는 문익환 목사님의 생생한 육성이었습니다. 외치고 또 외치다 돌이 되어 굳어버린 피맺힌 염원입니다. 철망을 넘어야 가볼 수 있는 도라산역. 목사님의 시비를 만나러 『월간 문익환』이 다녀왔습니다. ‘남쪽의 마지막역이 아니라, 북으로 가는 첫번째 역입니다’. 역내에 걸려있는 글귀처럼 하루 빨리 이 땅에 평화가 와서 다 함께 평양행 티켓을 예매하고 싶습니다. 6월호는 평화를 모티브로 지면을 꾸렸습니다. 2025년 늦봄통일상의 주인공들도 만났습니다.  <편집장>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지난 5월 2일. 전날 비가 온 뒤라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맑고 화창했다. 『월간 문익환』이 도라산역과 임진각 일대를 찾아갔다. 이번 방문의 주목적은 평화의 상징인 도라산역과, 그곳에 설치된 문익환 목사님의 시비를 직접 마주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우리 팀 3명은 ‘DMZ 평화의 길’ 방문 코스 중 파주 코스를 예약했다. ‘평화의 길’은 이름 그대로 평화에 다가가고자 하는 발걸음을 의미하는 여정이었다. 임진각 집결지에서 출발해 민통선 안쪽 생태길, 제3땅굴, 도라산역, 경의선도로남북출입사무소에 이르기까지, 대결의 시간 속 어디엔가 살아있는 평화의 흔적을 찾아보는 3시간의 순례길이었다. <글: 만당>
 
 

▶ 임진각 

경의선 철교에는 과거와 현재 두 개의 시간이

임진각 옥상에서 내려다본 경의선 철교에는 과거와 현재, 두 개의 시간이 공존하고 있었다. 전쟁으로 끊어져 낡은 교각만 남은 상행선, 그리고 2000년 이후 복원되어 현재 임진강역과 도라산역 간 셔틀 열차가 겨우 월 1회 운행되는 하행선. 전쟁이 남긴 상처 및 단절의 모습과 함께, 만남과 교류의 실낱같은 희망이 나란히 누워있는 풍경이었다. 

경의선 하행선 철교는 1990년대까지 남북 간을 왕래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박용길 장로가 이곳 임진각에 와서 북측대표단을 기다렸던 장면(1990년 7월 26일)도 이곳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말해준다. (당시 범민족대회 2차 예비회담이 열리는 서울을 방문하려고 판문점까지 왔던 북측 대표단은 숙소 등에 관한 남북 간 합의 불발로 개성으로 돌아갔다) 

임진각 건너편은 민간인의 자유로운 접근이 허용되지 않는 민통선 지역이라, 임진각이 심리적인 휴전선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광지화로 사람들이 북적이기 전에는 많은 이들이 임진강 너머를 북한이라 여겼다는 말이 실감 났다. 이곳은 자유롭게 넘을 수 없는 마음의 경계였다.   
 
◇임진각 옥상에서 바라본 망배단 너머 경의선 상하행선. 한쪽은 이어졌고 한쪽은 끊어졌다.
  
 
마당으로 내려와 망배단에 올라서니 명절마다 텔레비전에서 차례상을 올리는 실향민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임진각과 망배단과 실향민은 거의 동의어에 가깝다. 실향민들이 가족 친지와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 평화의 시작일 것이다. 
 
◇1995년 7월 방북 후 돌아오는 박용길 장로를 임진각에서 기다리며 망배단을 바라보고 있는 아들 문성근.  
 
  

통일을 기원하는 평화의 소녀상

망배단 오른쪽에는 소녀상 한 쌍이 세워져 있다. '통일로 가는 평화의 소녀상'이다. 이 쌍둥이 소녀상은, 위안부 문제가 민족 공통의 아픔임을 공유하고 민족 통일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아 2019년 4월 설치되었다. 소녀상 2기 중 1기는 평안북도 출신 길원옥 할머니를 상징하는 것으로, 바닥에도 길 할머니의 시를 새겨놓았다. 
 
◇임진각 맞은편 철길 조형물 옆에 위치한 '통일로 가는 평화의 소녀상' 

당초에는 소녀상 1기를 길 할머니의 고향으로 보내고 빈자리에 북한 제작 소녀상을 가져와 설치하는 걸 추진했지만 몇 년 동안 중단 상태다. 올해 광복 80주년을 맞아 처음 목적대로 북한 설치를 재추진하는 모양이다. 민족 공통의 아픔을 함께 치유하는 것도 평화의 과제임을 깨닫게 된다. 
 
  

▶ 철책과 땅굴 

‘대치의 상징’ 철책을 걷고, 땅굴을 보다

방문자 집결지에 도착, 신분증을 목에 걸고 방문자 식별용 녹색 조끼를 착용한 채 2시부터 일정을 시작했다. 첫 번째 코스는 임진강 생태길. 민통선 철책 안쪽 약 1.4km의 짧은 길을 걸었다. 왼쪽은 임진강, 오른쪽 철책 너머는 임진각 관광지다. 좌우로 탁 트인 강변길이라 시야가 넓고 편안했다. 고요히 흐르는 강물, 평평한 흙길, 초록색 강변 풍경이 조화를 이뤄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풀 베는 장병들과 예초기 소리조차 그 풍경의 일부였다. 관광 해설사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며 걷는 우리는 그 순간 평화를 향한 순례자였다. 
 
◇임진각 철책을 배경으로 개성과 서울까지의 거리를 보여주는 상징적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다음으로 도착한 제3땅굴. 이곳을 포함한 DMZ관광이 외국인 선정 한국 10대 관광코스 중 하나라고 해설사가 설명해주었다. 세계 유일의 분단 지역인 한반도의 군사적 대결 상황을 체감할 수 있는 곳이니 그들에게나 우리에게나 특별한 관광지임은 부인할 수 없지만, 별로 달갑지 않고 씁쓸할 뿐이었다. 지하 73m에 자리 잡은 땅굴. 벽면 곳곳에 뚫린 폭약 구멍, 천장에 부딪치는 헬멧 소리, 지하수가 저벅저벅한 바닥 등이 오랫동안의 대결 시대를 증언해 주고 있었다. 
 
 

▶ 도라산역 

남쪽의 마지막 역이 아니라 북으로 가는 첫 번째 역

 
◇‘타는 곳 평양 방면’. 기차표만 있다면 갈 수 있을까? 
 
◇남쪽의 마지막 역이 아니라 북쪽으로 가는 첫 번째 역입니다. 도라산역에 걸려있는 글귀. 
 
벽면에는 '남쪽의 마지막 역이 아니라 북쪽으로 가는 첫 번째 역입니다.'라는 글귀가 걸려 있었다. 옆에 걸린 유라시아 횡단철도 노선도는 도라산역에서 북한으로 들어간 철도가 중국과 러시아를 거쳐 유럽 끝까지 이어질 거라는 희망을 보여주고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명한 침목. 

뒤로 돌아서자, 김대중 대통령과 조지 부시 대통령이 다른 날짜에 각각 서명한 침목이 나란히 전시되어 있었다. 김 대통령은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 시대', 부시 대통령은 'May This Railroad Unite Korean Families'(남북한 이산가족들이 하나가 되기를)라 적었다. 이 침목들도 도라산역이 평화, 만남, 통일을 상징하는 곳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건만…. 

하지만 정작 우리가 찾던 문 목사님의 시비는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철로 주변에 있을 거라 상상하고 왔는데 접근이 불가했고, 설명을 끝낸 해설사는 버스로 돌아가자고 했다. 나는 바로 옆에 있던 미화원에게 물었다. “문익환 목사님 시비는 어디 있나요?” 미화원이 역사 바깥 버스 뒤편을 가리켰다. 조급한 마음에 급히 달려갔다.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라는 강렬한 문구가 커다란 울림처럼 다가왔다.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가슴 뭉클

드디어 시비가 눈에 들어왔다.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라는 문구, 그건 글이 아니라 절규였다. 가로로 쓰인 큰 조형물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가까이 다가가 사진을 찍으며 마음 한편이 뭉클하게 저렸다. 목사님의 절박한 목소리, 수십 년을 저렇게 외치고 계신 중이다. “하나도 평화, 둘도 평화, 셋도 평화입니다.” 그토록 평화를 염원했던 목사님이 끝내 다녀오신 이후 36년, 평양 가는 평화의 기차표는 아직이다.
 
◇시비 바닥에 새겨진 목사님의 얼굴과 ‘잠꼬대 아닌 잠꼬대’ 시.

시비 바닥에는 목사님의 얼굴과 ‘잠꼬대 아닌 잠꼬대’가 새겨져 있었다. 시를 읽어볼 틈도 없이 해설사의 이동 재촉에 밀려 우리 팀은 아쉬워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 남북출입사무소 

출입국사무소가 아닌, 출입사무소

마지막 방문지는 남북출입사무소. 출입국이 아니라 출입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출국과 입국 아닌 출경과 입경이란 생경한 표현. 그런 낯섦이 곧 이 땅의 분단 현실이다. 개성공단 가동 시기에는 하루 최대 약 700명, 차량 900대가 출입사무소를 통해 남북을 왕래했다고 한다. 지금은 단 한 명도 오가지 않는 막힌 길, 언제 평화의 길로 다시 열릴 것인가? 
 
◇아무도 찾는 이 없는 남북출입사무소. 
 
모든 출입 절차를 체험해 본 후, 잠시 기념 촬영 시간을 가졌다. 방문 기념으로 받은, 북한 지역 방문증명서 견본품을 손에 쥐고서, 서울과 개성 이정표를 배경으로 몇 장의 사진을 남겼다. 사진을 찍으며 들었던 어색함, 그건 대결과 긴장의 공기를 느끼는 곳이라 스스로 위축되어 그랬을 것이다. 남북 관계의 단절과 굴곡 속에서 내 안에 쌓인 벽이 더 높고 두꺼워진 듯하다. 

개성 공단 폐쇄 후 강산이 한번 바뀐다는 시간이 흘렀으니 곧 변화가 찾아올 것인가? 이럴 때 다시 문 목사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벽을 문으로 알고 박차고 나가라.”

우리의 이날 방문은 잠시였지만 목사님의 말씀은 오래 머물렀다. 도라산역, 이곳이 평화를 여는 희망이기를, 끝이 아닌 시작이기를 기원하며, 평화의 순례를 마무리했다.

<글: 조만석>

월간 문익환_<현장 탐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