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지노의 기록이야기>
334번 상자 속의 약봉지 (2025년 7월호)
생애 말기 문동환의 기록이자 가족들의 돌봄 기록
영미 선생님(문동환 박사의 딸)의 이사가 시작이었던 것 같다. 미루어두었던 문동환 박사의 유품과 기록이 아카이브로 들어오게 되었고 넉넉지 않았지만, 수장고 2층 공간에 앵글을 더 설치하면 충분했다. 그렇게 들어온 것은 책이 많았고 유품이 든 박스도 여럿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간이 흐른 뒤 더 이상 미룰 수가 없게 되어 다시 열어본 상자 속에 약봉지가 있었다.
◇문동환의 약봉지들, 2019.
꼼꼼히 적힌 복용지시문
눈앞에 놓인 누런 봉투, 하얀 봉투 속 약봉지들을 바라보다 의아한 마음이 들려는 찰나 낯익은 영미 선생님의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꼼꼼히 적힌 복용지시문이었다.
“아버지께서 몸이 안 좋거나 안 드실 때는
가슴 통증이 있는지 여쭤보세요.
가슴 통증이 있다면 NTG 약을 드리세요.
– 30분 기다린 뒤 여전히 통증이 있다면 약을 하나 더 드리세요.”
※찾아보니 NTG는 Nitroglycerin(니트로글리세린)인데 심장 관련 응급 상황에서 사용하는 혈관 확장제다
◇약의 종류와 언제 먹는지를 적어 놓은 메모들, 2019.
늦봄 아카이브엔 가족 돌봄 기록 다수
그 순간 뭔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늦봄 아카이브에서 봤던 가족들의 병상일지. 당번을 정해 환자의 병실을 함께 지키는 상황은 박용길의 편지를 읽다 보면 나오는 대목이기는 한데, 일지까지 함께 쓰면서 상태나 복용을 기록했던 것이 기억에 남았다. 또, 방북 이후 건강이 악화한 문익환 목사의 병원 치료를 요구하던 가족들의 활동 기록들도 떠올랐다. 이때는 상황이 심각해 많은 사람들이 함께 나서 농성해야 하는 상황까지 갔다. 맞다. 늦봄 아카이브에 가족들의 돌봄 기록이 꽤 있었다.
◇문익환 목사의 병원치료를 요구하는 농성 포스터, 1989.
🔗사료 링크
재미로 더하자면 교도소측 수용기록부 속에도 문익환 목사의 건강을 돌본(?) 듯 혈압을 표시한 기록들이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들의 목적은 고령에 고혈압인 문익환 목사가 단식도 자주 했기에 관리 차원에서 그랬을 테지만.
이 글을 준비하며 궁금함에 영미 선생님께 물어보니 이렇게 써둔 것은 당시 부모님을 돌보는 데 도움을 주었던 필리핀 언니와 요양사를 위한 것이라고 했다.
문득 우리가 모두 누군가의 아들이고 딸이라면
누군가의 삶 뒤엔 가족이 있고 그들의 흔적이 함께 남는다는 사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이 약봉지는 생애 말기 문동환 목사의 삶을 보여주는 물리적 기록이자, 거기 있었던 가족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가족 간의 사랑과 책임감이 고스란히 담긴, 소중한 돌봄의 기록인 것이다.
모든 것을 다 보존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아카이브의 현장엔 늘 의미 있는 것과 의미 없는 것을 가르고, 또 폐기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이 일상이다. 그 속에서 이런 일들을 경험하며 어느 순간 나는 가르고 선택하기보다 의미 엮기에 더 몰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문동환 목사의 약봉지가 가르쳐준 이 질문에 관해 독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역으로 질문을 던져본다. “당신의 가족에 관해 소중한 기록은 무엇이 있나?”라고.
지금, 이 약봉지는 한신대에 있는 늦봄 아카이브 2층 수장고, 334번 상자 속에서 잠자코 미래를 기다리고 있다.
<글: 지노>
◇2층 수장고에서 새로 짠 앵글 속 문동환 목사의 유품과 기록들, 2020.
◇ 334번 상자 속에 함께 들어있는 다른 기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