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

문동환의 떠돌이신학 (2025년 7월호)

“성서 속 주인공들처럼, 나는 떠돌이였다”
제도화된 교회와 권력에 대한 깊은 회의 
함께 나누며 돕는 생명공동체를 만드는 꿈

 
◇경기도 오산 한신대 캠퍼스 늦봄관 4층 베란다 공간에 문동환 목사의 벽화가 있다. 한신대 벽화 동아리가 그린 것으로 맞은편엔 형 문익환 목사의 벽화가 마주하고 있다. 
 
 
문동환 목사는 말년에 자신을 이렇게 정리했다. “나는 떠돌이였다.” 이 말은 단지 만주, 한국, 미국 등을 오가는 유랑의 삶을 뜻하지 않았다. 그는 기독교 신학, 제도 교회, 자본주의 문명 등의 현실 체제에 대한 비판 속에서 새로운 신학의 눈을 찾고자 궁구했고 그렇게 해서 떠돌이신학이 태어났다.

문 목사의 사상은 민중신학과 떠돌이신학으로 요약된다. 떠돌이신학은 대중에게 낯설지만, 그가 생의 끝자락에 천착한 독창적 신학이다. 이 글에서는 떠돌이신학의 정의나 이론을 자세히 해설하려 하기보다는, 그가 겪은 문제의 순간 몇 가지를 따라가며 떠돌이신학의 배경과 맥락을 엿보고자 한다.
 
◇박재동 화백이 그린 문동환 캐리커처(ⓒ박재동, 2008)
 
 

 #1. 대학 제도권에서의 절박한 호소

1985년 한신대 교수로 복귀한 그는, 신학대학이 가야 할 미래의 길을 고민하며 동료 교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21세기는 세계화의 풍조에 따라서 나라마다 더욱 산업화되어 외적으로 발전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빈부 격차가 날로 늘어나 사회 불만이 점증할 것이요, 환경 파괴도 점점 더 심화할 것이다. 결국 가난한 이들의 반란으로 자본주의적인 산업문화에 큰 혼란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북극해의 얼음이 녹아 해수면이 높아질 뿐만 아니라 기후에도 큰 변화가 올 것이다. 따라서 생태계의 현상 유지를 보장하는 산업 발전의 문제가 크게 부각될 것이다. … 따라서 생명을 살리는 새로운 문화가 요청될 것이다. 우리 학교는 이에 대응할 수가 있어야 하고 교회는 이에 대한 선교적 사명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 (문동환. 2009)

40년이 지난 지금, 그의 경고는 오히려 더 선명하게 들린다. 당시 그는 민중신학의 실천적 전통을 이어가며, 생태 위기와 사회 양극화에 대응할 수 있는 교회의 사명을 고민하고 있었다.

 

 #2. ‘제도’ 교회에 대한 깊은 회의

숨 가빴던 몇 년간의 정치 활동을 정리하고 1991년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목회 활동을 하며 현장에서 그의 신학 사상을 실천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교회가 더 이상 하느님의 생명운동을 실현하지 못하고 있음을 절감했다.

“교포들이 다니는 한인 교회들은 사회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동참해야 한다는 나의 비판적인 설교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른바 ‘세계화’의 입김으로 개인주의적인 산업문화가 온 세계를 뒤덮고 있는데도, 교회는 여전히 그저 숫자놀음에만 미쳐 있었다. 심지어 어떤 목사는 자기가 이룩한 초대형 교회를 마치 재벌이 기업을 자손에게 넘기듯 자기 아들에게 물려준다고도 했다. 이런 제도 교회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유대의 기득권자들이 바알 신을 섬기는 문화에 젖어 있다가 로마제국의 천하가 되자 다시 그들과 손을 잡아 저희 배만 채우려고 했던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나는 한 가지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하느님이 하시는 생명운동이 제도화되면 그 생명력을 잃고 만다는 것이었다. 성서도 그것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었다.” (문동환. 2009)

그는 교회라는 ‘제도’에 회의했다. ‘제도’는 곧 강자와 기득권자들을 위한 바벨탑이었다.

 

 #3. 성서 속 주인공, 떠돌이

다시 성서를 파기 시작한 그는 성서의 주인공들이 하나같이 떠돌이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애굽에서 아우성치던 히브리인과, 그들의 지도자 모세, 갈릴리의 예수와 제자들… 그들은 단순한 유랑자가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를 여는 존재였고, 하느님은 그 떠돌이와 함께 있었다.

 

 #4. 전 지구적 떠돌이와의 만남

그는 성서 공부 도중에 또 다른 충격을 받았다. 한국 민중만 생각하고 있던 그에게 전 세계 방방곡곡에 떠도는 떠돌이들이 몸부림치는 모습이 역력히 보인 것이다.
 
 “미국에 와서 전 세계적으로 자기 땅에서 밀려난 떠돌이들이 수억이나 된다는 사실을 알고 가슴이 에이는 듯했다. 신자유주의라는 이름 아래 전 세계로 횡행하면서 자기 배만 채우는 다국적기업들의 횡포로 수억의 무리들이 자기들이 살던 고향에서 밀려나서 살길을 찾아서 유리방황하는 것이었다.” (문동환. 2009)

그에게는, 자본주의 산업 문화로 밀려나는 농민, 팔려 가는 여성, 불법 이주노동자, 난민… 이들 모두는 21세기의 떠돌이들이며, 새 신학의 주체였다.

그의 떠돌이신학은 제도화된 교회와 권력으로부터 밀려난 존재들, 그 떠돌이들이 집단적 깨달음으로 하느님을 새롭게 발견하고, 함께 나누며 돕고 사는 생명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이었다.
 
지금의 교회에 대해서는? 교회를 믿으면 복을 받아 사업이 성공하고 자녀가 출세한다는, 장사꾼처럼 거짓 선전을 복음이라 전하는 교회는, 고객이 원하는 상품을 잘 포장해서 파는 백화점 같은 곳이라 규정했다. 그런 교회는 종교의 이름을 띤 산업 문화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고! (문동환. 2012)

 
<글: 조만석>

[참고문헌]
문동환(2009). 『문동환 자서전』. 삼인
문동환(2012). 『바벨탑과 떠돌이』. 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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