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특별 기고>

문동환 목사를 추억하며 - 김상근 목사 (2025년 7월호)

[💌편집장의 커버스토리]
경기도 오산에 있는 한신대 경기캠퍼스. 오월계단 앞 문동환 목사의 기념 조형물은 좀 생소합니다. 버려진 기계 부품들이 얼기설기 얽혀있는 고철들의 조합. 이것이 문동환 목사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버려진 고철은 역사에서 밀려난 민중입니다. 외면받은 떠돌이입니다. 이 떠돌이들이 함께 나누며 도와 공동체를 이루고, 이들이 다시 역사의 주인공으로 부활한다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바로 문동환 목사의 ‘떠돌이신학’입니다.

“나는 떠돌이였다”라고 자신을 정의한 문동환 목사. 문익환 목사의 동생으로 ‘따로 또 같이’  역사의 현장을 지켜온 그가 『월간 문익환』 7월호의 주인공입니다.   
 
 

“나는 그에게서 삶을 배웠다”

김상근 목사(늦봄문익환 기념사업회 고문)
 
 
◇마이크 앞에서 소회를 밝히고 있는 말년의 문동환 목사(왼쪽)와 김상근 목사. 
 
 
기독교교육학은 2학년 필수과목이었다. 강의가 너무 못마땅했다. 친구들을 선동하여 강의를 보이콧했다. 이때 기독교교육학은 학문 같지 않다는 선입견이 생겼다.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
 
 

큰 눈, 큰 키, 큰 목소리에 시선집중

문동환 교수님은 1961년 내가 한국신학대학 3학년 때 교수로 오셨다.

미국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교수로 취임하신 거다. 외모와 인상이 아주 강했다. 큰 목소리, 서글서글한 눈, 큰 키, 성큼 성큼한 걸음걸이, 큰 손짓, 서구풍이랄까 모두가 여느 교수들과는 달랐다.

문동환 교수 강의가 선풍을 일으켰다. 다르다! 다르다! 강의가 너무 좋다! 학교가 술렁였다. 솔깃했다. 듣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수강 신청은 이미 마감되었다. 신청하지 않고 듣는 도강(盜講 audit without permission)에 나섰다.
 
 
◇한신대 교수시절 문동환 목사. 큰 키에 서구적 외모로도 주목을 받았다.
 
 

문 교수 강의 ‘도강’으로 들어

<자아확립>이라는 강의다. 눈이 번쩍 띄었다.

내가 누군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신학생으로서 이미 성찰했어야 했던 자기를 비로소 발견하게 되었다. 기독교교육학 강의를 들은 것은 문 교수님 강의가 유일했다. 도강으로. 그러나 지금까지도 오래 내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
졸업 심사 때 기독교교육학 필수학점을 이수하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되었다. 필수학점은 반드시 이수해야 했다. 당시 나는 대한기독교복음교회 소속 신학생으로 이른바 ‘타 교단 신학생’이었다. 위촉 학생 비슷했다. 기장 소속 신학생들에게 필수인 것도 나에게는 예외일 수 있었던 거다. ‘이 시끄러운 놈, 졸업시켜 버리자.’는 데 교수님들 모두 이의가 없으셨단다. 타 교단 학생이라서 졸업 심사를 통과할 수 있었다.
 
 

“이게 뭡니까? 물러나십시오” 

왜 시끄러운 학생이었나? 학교 안에 묘한 기류가 있었다. 지방색이었다.

함경도와 경상도가 대립했다. 호남은 친 함경도다. 학교에 재정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는 경상도 출신 보직교수가 냈다. 그러나 경상도 출신 교수들과 학생들이 사고 낸 교수님을 옹위한다. 당시 학장이신 장공 김재준 목사님이 궁지로 몰리게 되었다. 나는 학생들을 규합해서 경상도 그룹에 맞섰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내가 타 교단 학생이라는 의식이 없었다.

치열하게 싸웠다. 대자보를 벽에 붙이고, 유인물을 뿌려댔다. 당시 대자보라는 용어는 없었다. 모조지 전지에 글을 써 벽에 붙였으니 그게 대자보 원조 아니었던가.

수업이 안 된다. 문동환 학생과장께서 양측 대표를 부르셨다. 양쪽 주장을 신중하게 모두 들으신다. 오늘 이 시간 이후 잠시라도 휴지기를 가지자는 데 합의했다. 당분간 벽보, 유인물을 내지 말라는 것이 문 학생과장의 요구였다. 우리는 구두로 약속했다. 문동환 학생과장이 보증자였다.

다음 날 점심시간이었다. 학생관 식당에 유인물이 살포되어 있다는 거다.

달려갔다. 사실이다. 우리 쪽 학생 몇이 유인물을 걷고 있었다. “야, 우리가 왜 주워? 그대로 내려놓아! 학생과장 불러와!” 학생과장이 그 넓은 보폭으로 단숨에 달려오셨다. “이게 뭡니까? 어제 한 약속조차 지켜내지도 못하는 학생과장, 물러나십시오.” 문동환 학생과장은 친히 한 장 한 장 그 유인물을 줍는다. 입을 꽉 다문 채. 아무 말 없이. 학생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그러고는 주방 가마솥 아래 활활 타고 있는 장작불에 던져 태워버리신다. “야, 너희들 뭐해? 어서 줍지 않고.” 삥 둘러서 있는 학생들에게 말씀함 직도 하지 않은가. 다시는 유인물이 나오지 않았다.
 
훗날 그날 일이 자꾸만 떠올랐다. 지도자가 자기 책임을 미루지 않고 스스로 진다!
 
교수님처럼 하자! 배움은 강의만이 아니다. 아니, 스승의 강의도 강의지만 삶을 배우는 거다!
 
 

교회 오셔서 “나 성경책 좀 줘”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나는 서울복음교회에서 교회생활을 했다.
청년들이 꽤 많았다. 유명 인사를 초청하여 청년신앙강좌를 여는 등 활동도 활발했다. 물론 문동환 목사님도 초청했다. 당시 목사님들은 성경과 찬송가 책을 가슴에 대고 다녔다. 일종의 목사 패턴이었다.

문동환 교수님은 등산용 가방 같은 것을 들고 오신다. 강단에 올라 나란히 앉았다.

‘나, 성경 찬송가 좀 줘.’ 가방에도 없는 거였다. 아예 가지고 오지 않으신 거다. 당시로서는 파격이다. 그러고는 이어 하시는 말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강사료, 얼마나 주나?’ 귀를 의심했다. ‘000 원 준비했는데요.’ ‘좀 모자라겠는데.’ 더 달라는 말씀인가? 얼른 좀 더 준비했다.

강연이 끝나자, 동대문시장에 가자고 하신다. 늦은 밤에 ‘떨이요. 떨이요.’하는 사과를 사가시고자 하셨던 거였다. 사모님 부탁이었을 거다. 그 가방에 가득 담으면 얼마큼 할 거라는 것도 듣고 오셨던 거다. 강사료가 모자랄 것 같다고 계산하신 것이었다.

이런 경우 나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 속으로는 부족한데 하면서도 말을 못 꺼낼 것이 분명하다. 그럴 것이다. 가깝다고 여기는 제잔데, 아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이여야 사제간이다. 저 스스럼 없는 사제 사이가 진짜 사제간일 것이다! 떨이 사과지만 가방 가득 담아 드린 것이 좋았다. 체면에 매이는 것, 아직도 벗지 못하고 있다. 미쳐 덜 배운 거다.

 

수도교회에 목사님으로 초빙

문동환 목사, 수도교회를 담임하게 된다.

수도교회는 6.25 한국전쟁 때 부산에서 첫 예배를 드린 교회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국민들은 인민군을 피해 부산과 제주도로 피난했다. 두서너 가정이 중심이었다.

훗날 한국유리공업사를 창업한 최태섭 사장 가족, 최 사장 부인 김성윤 교우의 친구 김반옥 교우 가정 등이 부산에서 만나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수도교회의 창립이었다. 서울을 수복해서 지금의 사직터널 남쪽 터널 위에 작은 교회당을 지어 예배 처소로 삼았다. 사직공원을 중심으로 점집이 널려 있고, 교회당 위쪽은 쪽방 동네가 있었다. 그 가난한 동네에 주일이면 흔치 않은 자가용차들이 길가에 죽 주차되었다. 최태섭 사장님과 그를 가까이하는 기업인들이 예배에 참석했기 때문이었다.
 
◇1969년 2월 수도교회 공동예배 주보. 김상근 목사가 사회를 보는 가운데 문동환 박사가 증언자로 나왔다. 

 

보필하다 담임목사 이어받아

최태섭 집사가 장로로 임직받고 문동환 목사님을 설교 목사로 초빙했다. 좋은 설교 듣자는 의도였다. 당시는 목사 수가 모자라는 때라 교수들의 목회 겸직을 권장했다. 문동환 목사는 설교만 할 목사가 아니었다. 물론 설교가 달랐다. 교인들을 움직이게 했다. 수요예배를 ‘수요강좌’로 바꾸어 기독교인의 삶에 대해 강의하고 토론했다. 예배실 정면에 비스듬한 십자가를 붉은 종이로 오려 붙였다. 교회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일이 보이기 시작했다. 열정이 끓어 올라왔다. 문제는 목사님이 교수를 겸한다는 것이었다. 주일예배는 꼭 인도하지만, 수요강좌도 온전히 감당할 수 없었다. 주중 일은 아예 할 수 없다.

 

“목사가 무슨 일을 하든 교회가 뭔지 알아야”

전도사를 두어 목사님을 보좌하게 하자고 했던 거다.

누굴 오라고 할까? 나와 한신 동기이고, 핵심 교인 최승국이 김상근을 추천하고, 교수님이 좋다고 하셨던 거다. 최승국이 교수님의 뜻을 전하면서 교수님이 만나자고 하신다는 것이다. 나는 교회에 갈 생각이 없었다. 신학교 입학할 때 생각대로 기독교 사회운동을 하고 싶었다. 이미 서울YMCA 총무님의 면접을 마치고 통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러나 교수님이 만나자고 하신다. 아니 갈 수 없다. 내 사정과 뜻을 말씀드렸다.
그런데도 교회 일을 해 보라고 하신다. 재학 때 인상이 별로였을 텐데 의외였다. 아니다. 교수님은 그때 ‘이놈, 쓸만한 놈이네.’ 하셨을지 모를 일이다. 3년만 일하겠다고 기간을 약속했다. 그러나 전도사로, 부목사로 보필하다가 담임목사를 이어받았다. 약 15년 일했다.

그때 내게 하셨던 말씀을 오래 마음에 두고 있다. “목사가 무슨 일을 하든지 교회가 뭔지 알아야 해.” 교회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나는 여러 일을 해왔고 하고 있다. 내 삶 한복판에는 ‘이 일과 교회는?’이라는 자문이 있었고, 있다.
 
 

“신학, 특히 삶을 배웠다”

신학교 시절 문동환 교수님 강의를 듣지 않은 것을 아신다.

전도사 초기 매주 월요일마다 목사님을 찾아뵈었다. 보고도 하고 지시도 받고 가르침도 받았다. 그것으로 부족하다고 여기셨던가 한 주간에 읽을 책을 두 권씩 주셨다. 월요일마다 목사님을 뵐 때 읽은바 소감을 설명해야 했다. 세미나였다. 벅찼다.

학생 시절 보신 김상근의 부족한 공부를 벌충케 하신 거다. 큰 학자 문동환 박사님이, 큰 목사 문동환 목사님이 개인교수였으니 더 이상 뭘 바랄까.

목사님에게서 나는 신학, 특히 삶을 배웠다.

그 배운 삶의 이야기, 많다. 다음 기회로 미룬다.

<글: 김상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