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사료의 발견>
박용길이 동서 문혜림 환갑에 쓴 글 (2025년 8월호)
“낯설고 물설은 나라에 와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미국에서 시집온 아랫동서 문혜림을 바라보는 박용길의 편지에는 애틋함이 절절하게 묻어납니다. 1996년 문혜림의 환갑에 맞춰 그녀를 생각하는 긴 글을 편지에 담았습니다.
“새벽의 집을 시작하여 공동체 생활을 한 일도 있었고, 농촌으로 들어가서 먼 길을 출퇴근 하는 일도 있었고, 불우한 윤락여성을 돌보는 일도 있었고, 남편이 감옥에 갇혀서 옥바라지를 하는 일도 있었지만 모-든 일을 남편이 하는 일이라면 믿고 기쁘게 해 나갔기 때문에 그 어려운 일들을 감당해 나갔을 것이다.”
낯선 나라, 낯선 땅에서 낯선 이들과의 공동체 생활을 하고, 적막한 시골에서 외로이 살기도 하고, 기지촌 여성들을 위해 두 팔 걷고 뛰어들고, 수감된 남편을 헌신적으로 옥바라지하고, 구속자 석방을 위해 거리에 나선 문혜림의 삶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박용길은 이 편지에 담담히 적었습니다.
“모든 일을 남편이 하는 일이라면 믿고 기쁘게 해 나갔기 때문에 그 어려운 일들을 감당해 나갔을 것이다.”
◇시위 단체복인 보라색 한복을 입고 거리로 나서 구속된 남편의 석방을 외치던 문혜림과 박용길(1976)
◇고향 미국에서 환갑을 맞이한 문혜림. 박용길의 글은 문혜림의 회갑 기념 문집에 실릴 예정이었으나 문집 대신에 단행본 『아무도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다』(문영미, 1999)가 출간되었다.
▲편지 본문
1961년 12월 16일 경동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미국 아가씨는 신혼여행을 떠났다. 신혼 살림을 한신 캠퍼스에 채렸는데 낯설고 물설은 나라에 와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된다.
어머님께서는 느즈막이 얻으신 둘째 며느리가 사랑스러우셔서 아침저녁으로 찾아가셔서 통하지 않는 말을 하셨는데 그것이 그렇게 힘이 되었다고 나중에 들었다. 그때만 해도 연료는 연탄을 떼었기 때문에 연탄이 꺼질 때도 있었고 깨질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번개탄이 있지만 피우기 너무 어려웠다. 그래도 날짜를 정해놓고 부모님을 모셔다가 음식을 대접하곤 했다. 전기가 안 들어와서 고생을 할 때도 있었는데 어떻게 헤쳐나갔는지 나는 그때만 해도 대화에 자신이 없으니까 자주 만나지 못하고 지낸 것이 미안할 뿐이다. 좋은 형님 노릇을 못 한 것이 가슴 아프다.
동서는 성격이 명랑하고 쾌활하여서 어려운 일을 만나도 당황하지 않고 잘 이겨나갔다. 큰아들 창근이, 둘째아들 태근이, 딸 영미, 영혜 사남매를 기르면서 한국에서는 소띠, 개띠, 양띠, 무슨 띠니 무슨 띠니 하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서 자기는 열두 띠를 다 한번 기르고 싶다고 하였다.
예배시간이면 문 박사가 옆에 앉아서 설교를 영어로 적어가며 통역을 하곤 하였다.
새벽의 집을 시작하여 공동체 생활을 한 일도 있었고, 농촌으로 들어가서 먼 길을 출퇴근 하는 일도 있었고, 불우한 윤락여성을 돌보는 일도 있었고, 남편이 감옥에 갇혀서 옥바라지를 하는 일도 있었지만 모-든 일을 남편이 하는 일이라면 믿고 기쁘게 해 나갔기 때문에 그 어려운 일들을 감당해 나갔을 것이다.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1976년 3월에 남편이 군산으로, 청주로 교도소 생활을 할 때 면회를 다닌 일이나, 다른 가족들과 어울려서 찬송가를 부르며 시청 앞, 광화문을 누비던 일들을 잊을 수가 없다. 한번은 더운 여름에 보라색 한복을 똑같이 해입고 종합청사로, 서울구치소로, 안국동으로 걸어다닌 일이 있는데 버선에 고무신까지 신고나와 발이 아파하던 일. 그때 우리가 기적이 일어나야겠다는 말을 했는데 기적을 기저귀로 알아듣고 18년 동안 갈지 않은 기저귀를 갈아치워야 한다고 해서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우리가 영어를 좀 가르쳐 달라고 하면 내가 한국말을 영어보다 더 잘하게 되기까지는 가르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단념한 일이 있다. 한국말은 물론이고 모-든 것을 배우려고 애쓰고, 우리들에게 사과파이 등 과자 굽는 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30여 년을 하루 같이 노력에 노력을 기울이며 살았으니, 어려서 거닐던 고향에 가서 살아보고 싶은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만 국제결혼 한 사람들 중에 제일 모범적인 가정이라고 하던 가정이었는데 멀리 떨어져서 지내게 되니 섭섭한 마음이었는데 멀리 미국에서 환갑을 맞게 된다니….
창근, 태근, 영미는 결혼을 하고 창근이는 지혜, 하늘 남매를 두었고, 태근이는 단아라는 딸을 두어서 무슨 때면 모두가 모여서 즐겁게 지내게 되었으니 기쁘다. 맏손자 하늘이는 할아버지 문 박사의 생신날인 5월 5일이 생일이어서 같은 날 어린이날을 지낼 수 있게 되었다.
한국말을 익숙하게 잘할 뿐 아니라 한문자까지도 풀이를 해서 거륵 聖(성) 자는 ‘임금님은 귀가 크고, 입이 작아서 남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띠리링 띠리링 비켜나세요. 자전거가 나갑니가 띠리리리링’하며 유희를 곁들여 노래를 부르지요. 지금은 노래부를 때 율동을 곁들이는데 그때부터 선견지명이 있었나봐요.
한신국민학교가 나병자, 미감아를 받기 위해서 시작되었다고 하며 그때는 미감아들을 방문하는 일이 있었다는데 그 아이들과 가까이 하는 것을 꺼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동서는 그 어린이들의 코를 직접 닦아준 일이 있어서 모두를 놀라게 하였다고 합니다.
(뒷장 없음)

◇ 1996년 환갑을 맞은 문혜림을 생각하며 박용길이 쓴 글. 모닝글로리 줄 공책에 썼으며 세 장이 남아있다.
월간 문익환_<사료의 발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