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늦봄의 말과 글>

큰 어둠, 작은 빛 (2025년 10월호)

작은 빛이 모여 큰 어둠을 걷어낸다

 
◇ 조명이 쏟아지는 단상에서 연설 중인 문익환 목사 
 
  

‘촛불 혁명’과 ‘빛의 혁명’이라는 ‘작은 빛’ 

두 차례의 대통령 파면을 이뤄낸 ‘촛불 혁명’과 ‘빛의 혁명’은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수많은 시민의 연대가 있어 가능했던 결과였다. 고귀한 생명과 일상의 평화를 지키려는 열망을 담아 한 사람 한 사람이 손에 쥔 촛불과 응원봉, 그 작은 빛들은 서로를 광장으로 불러냈다.

이 작은 빛들은 단지 감동적 장면이 아니라 ‘공동의 결심’이었다. 빛, 즉 결심은, 이름이 다르고 생각이 달라도, 불의가 드리운 어둠 앞에서 우리는 서로를 비추며 한 걸음 더 나아갈 이유가 된다. 그래서 작은 빛은 언제나 둘이 되고, 셋이 되고, 마침내 길이 된다.

빛과 어둠의 대결은 어느 시기 어디에나 있었다. 늦봄 문익환 목사가 학생들을 가르치며 목회를 하던 1966년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4·19혁명의 빛은 잠시 세상을 밝혔지만, 5·16군사쿠데타가 다시 어둠을 짙게 드리웠다.

늦봄은 불의와 부정이 판치는 세상을 모른 체 지나치지 않았다. 한국 경제의 일본 예속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는 와중에 일본 차관으로 기업 한다는 자들이 사카린 밀수로 이익을 챙긴다는 뉴스는, 그에게 분노이자 각성이었다. 분노는 혼자만의 것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어둠을 걷어내는 빛을 묻고, 가르치고, 설교했다. 그가 붙잡은 이야기는 ‘청년 예수’였다. (1966년 9월 25일 설교, 「큰 어둠, 작은 빛」)
 
온 땅을 뒤덮은 어둠은 너무나 컸습니다. 거기 비해서 이 젊은 청년 예수, 순수한 심정으로 신선한 새 가르침을 전하는 이 청년 예수에게서 빛나는 빛은 너무나 작았습니다. 정말 하잘것없는 것이었죠. (문익환 1999)

늦봄의 생각으론, 예수의 ‘3년 전도 생활은 잠깐 팔락거리다가 꺼져 버린 호롱불’에 불과했다. 어떤 권력도 갖지 못한 예수. 예수는 로마제국과 그에 빌붙은 기회주의자들의 ‘억압과 착취에 깔려 죽어가는 동족을 애타게 사랑하는 붉은 마음’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작은 마음이 결코 힘이 없음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순수한 마음, 그 뜨거운 심장, 그 붉은 피에서 빛나는 빛은 반딧불처럼 보잘것없는 것이었지만 엄청난 어둠도 그 빛을 덮어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어둠이 짙으면 짙을수록 그 빛은 뚜렷하게 더욱 광채를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문익환 1999)
 
어둠에 질식할 것 같은 사람들이 예수 앞으로 모여들고 무시 못 할 세력이 되자, 암흑의 도당들은 귀찮은 반딧불을 꺼버리려 십자가에 그를 처치해 버렸지만, 예수의 ‘사랑은 너무나 뜨거워서 사람들의 혈관 속에서 식어버릴 수가 없었’다. 마음마다 번진 그 작은 반딧불이 어느 순간 대낮 같은 환함을 만들었다.
 
그에게서 ‘빛나는 반딧불은 아무것으로도 끌 수 없는 참 빛이었습니다. 이미 사람들의 마음에서 그와 같은 작은 반딧불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별안간 어둡던 세상, 그믐밤 같은 세상이 대낮처럼 환해졌습니다. 사람들의 마음 마음에서 빛나는 작은 빛들, 아무것으로도 끌 수 없는 이 작은 반딧불이 온 세계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문익환 1999)

독선과 부정의 세력은 예수의 무리를 예수처럼 다잡아 죽이려 했지만, 될 리가 없는 일이었다.
 
이 반딧불같이 작은 빛들은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더욱 퍼져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빛은 작은 반딧불이 되어 세계에 번져 나간 것입니다. 작고도 큰 빛이죠. (문익환 1999)

예수가 밝힌 작은 빛은, ‘신자들의 마음 마음에서 빛나는, 작기는 하나 참된 큰 빛으로’ 비쳐 왔고, ‘조직된 교회, 형식적인 신앙, 위선에 찬 선행 때문에 가리어지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의 빛은 세계를 비추고 있다’고 늦봄은 설교했다.

늦봄은 강단에서만 말하지 않았다. ‘작은 빛’의 신학은 곧 삶의 윤리가 되었다. 그는 사카린 밀수 기사가 실린 그 신문 모퉁이에서, 한 청년의 글을 발견한다. 굶주림에 고아원을 뛰쳐나와 구걸하지만 왕초에게 모든 걸 바치고 나면 남은 것이 없는 아이는, 생각 끝에 이 청년에게 매일 10원씩 저금하기로 했고, 청년은 아이에게 저금 통장까지 만들어 준 작은 실천의 이야기. 늦봄은 청년의 행동에서 ‘작지만 분명한 빛’을 보았다. 그래서 제안했다. “우리 3천만 국민이 하나같이 작은 반딧불이 되어보면 어떨까요?” 이것은 선언이 아닌 초대였다. 스스로 먼저 작은 빛이 되어 노동의 현장, 인권의 현장으로 걸어 들어간 늦봄의 삶이 그 초대를 증명했다.

 

늦봄에게 ‘작은’이라는 형용사는… 

늦봄이 말한 ‘작은’이라는 형용사는 힘의 부족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출발점의 크기를 말할 뿐, 결속의 크기를 말하지 않는다. 작은 빛은 서로를 향해 모이면 대중적 힘이 된다. 한 사람의 용기가 둘의 결심을 부르고, 작은 실천들이 서로를 확인하는 순간 개인의 윤리가 공동의 정치가 된다.

우리는 이를 지난겨울과 봄 사이에 또 한 번 경험했다. 작은 빛은 그 밤을 버텼고, 그 다음 날을 조직했고, 그 이후를 견디며 절차와 제도의 힘으로 어둠을 물러나게 했다. 작은 빛의 연대가 무엇을 이길 수 있는지 이미 보았다. 이 경험이 있기에 다음의 위기나 어둠도 헤쳐 나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다.
60년 전 늦봄의 설교는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 다 그리스도의 작은 빛, 어떠한 흑암도 뒤덮을 수 없는 참 빛으로 살아보지 않겠어요? 우리의 생활에서 빛날 작은 빛, 눈에 보일락말락 하는 작은 빛을 업신여기지 맙시다. (문익환 1999)

이제 우리의 차례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빛을 켜야 한다. 일상의 평화를 지키는 선택, 생명을 귀히 여기는 판단, 서로의 권리를 내 것처럼 존중하는 행동. 그 빛이 서로를 부르는 순간, 어둠은 더 이상 어둠일 수 없다. 눈에 보일락말락 빛이라도 켜두면 서로를 부를 때 큰 참 빛이 된다.

<글: 조만석>

[참고 문헌]
문익환 (1999). 「큰 어둠, 작은 빛」 『문익환 전집 9권』 설교. 사계절출판사
1966년 9월 22일 목요일 자 동아일보 6면거지 소년의 저금통장」🔗(기사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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