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현장탐방>
제186회 씨알순례길: 5.18묘지와 전남대민주길 동행기 (2025년 10월호)
‘임을 위한 행진곡’ 들으며 추모탑에 서자…
왜 양심이 나를 아프게 하는가?
◇ 국립5.18민주묘지의 5.18민중항쟁추모탑
씨알순례길은 2011년 12월 구기동 유영모 자택지터와 정릉 김교신 자택지터 방문을 시작으로 현재 15년째 이어오고 있다. 지난 9월 12일 제186회 씨알순례단(대장 김영덕)은 국립5·18민주묘지, 전남대민주길(5·18광장, 윤한봉 정원, 윤상원 숲, 김남주 뜰과 기념홀, 벽화마당)을 찾아 광주로 향했다. <광주=박영옥>
비에 젖은 민중항쟁 추모탑
▶비가 오는 5.18민주묘지
비가 오락가락하더니 순례길 시작에 비가 내린다. 5·18민주묘지 사무실에서 준비한 검정 우산을 쓰고, 5·18민주묘지를 감싸는 <임을 위한 행진곡>과 함께 5.18민주묘지의 민중항쟁 추모탑 앞에서 참배했다.
이번 순례길은 임낙평 들불열사기념사업회 이사장과 김은경 목사(전 윤한봉기념사업회 이사장)의 안내로 진행됐다. 임낙평 이사장은 들불야학의 시작을 같이한 7분 중의 한 분이고, 『윤상원 평전』을 집필했다. 김은경 목사는 윤한봉의 미국 밀항을 도운 분이다. 두 분은 5·18을 현장에서 치열하게 경험한 분들이어서 해설 하나하나가 당시 모습을 재현하는 듯했다.
젊은 나이에 별이 되어 영혼 결혼식
▶윤상원, 박기순의 합장 묘지
임낙평 이사장은 윤상원, 박기순 합장 묘지에서 두 분의 사연을 들려준다.
묘역번호 1묘역 2-11에 안장된 박기순(1957.11.7~1978.12.26)은 1978년 7월 노동야학인 들불야학을 창립하여 강학으로 활동하다 21살 때 연탄가스 중독으로 어이없는 죽음을 맞게 된다. 영결식에 참석한 김민기가 <상록수>를 불렀다고 한다.
윤상원(1950.9.30~1980.5.27)은 1978년부터 들불야학의 강학으로 활동, 5.18 당시 항쟁지도부의 대변인으로 내외신 기자 회견을 진행하고, 시민군을 진두지휘했다. 도청에서 마지막까지 항전하다 5월27일 새벽 계엄군의 총격에 31세의 짧은 생을 마감한다. 박기순과 윤상원은 1982년 2월 20일 영혼 결혼식을 올리고, 1997년 망월동 신 묘역에 합장했다.
◇윤상원, 박기순 합장 묘지에서 두분의 사연을 들려주는 김은경 목사
1982년 4월, 황석영 작가는 두 사람의 영혼 결혼식을 기념하는 창작 노래극 ‘넋풀이’를 제작했다. 이 노래극의 마지막을 장식한 노래가 민주화운동의 상징 노래인 <임을 위한 행진곡>(백기완 시를 바탕으로 황석영 작사, 김종률 작곡)이다. 군부 시대인 당시 모든 일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김은경 목사에 따르면 <임을 위한 행진곡>은 카세트테이프 200개를 만들어 미국, 일본으로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한신대 개교 기념일 행사에서 처음으로 공연했는데 며칠도 안돼 집회마다 불러 깜짝 놀랐다고 한다.
전남대는 사회과학대학 중앙 정원에 윤상원 숲을 만들고, 흉상과 기념석을 세웠다. 건물 내에는 ‘윤상원의 방’과 ‘들불야학’을 재현해 놓았다.
◇전남대 윤상원 숲에 세워진 윤상원의 흉상
한강 작가에게 영감을 준 박용준의 일기
▶‘왜 양심이 나를 아프게 하는가’ 박용준 열사
묘역번호 1묘역 2-38에 안장된 박용준(1956.7.9~1980.5.27)는 들불 7열사 중 한 명으로 민중소식지 ‘투사회보’를 필경 작업으로 만들어 배포했다. 그의 필경 서체는 현재 ‘박용준 투사회보체’로 남아있다. 그의 마지막 일기에 담긴 ‘왜 양심이 나를 아프게 하는가’, ‘희생으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기꺼이’는, 한강 작가가 『소년이 온다』 집필에 막혔을 때 다시 글을 이어갈 수 있게 해준 구절이다.
그는 5월 27일 광주 YWCA 2층 창가에 총에 맞은 채 발견되었다.
옥중에서 단식투쟁 끝에 사망
▶탁월한 언변의 박관현 총학생회장
◇박관현의 묘
묘역 번호 1묘역 2-88에 안장된 박관현(1953.6.19~1982.10.12)은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탁월한 언변과 투철한 의식으로 꽉 찬 그의 도청 앞 연설은 한번 들으면 잊지 못한다고 한다. 박관현이 도청 앞 분수대에 서기만 하면 시민들은 박관현을 연호하고, 지도자로 신뢰했다. 임낙평 이사장은 그는 항상 검정 고무신을 싣고, 성격은 화통하고, 독서를 즐기는 모범적인 청년이었다고 회상한다.
박관현은 5.18 당시 광주를 빠져 나와 1982년 4월 8일까지 서울 삼양동, 공릉동 등에서 위장 취업하며 도피 생활을 하다 현상금에 눈이 먼 회사 직원의 고발로 체포된다. 옥중에서 수용자들의 처우개선을 요구한 단식투쟁 끝에 사망한다.
전남대는 ‘민주화의 새벽기관차 박관현’ 조각과 박관현 언덕을 조성했다.
망명해서 5.18 진상규명 운동
▶미국으로 밀항한 윤한봉
묘역 번호 1묘역 6-12에 안장된 윤한봉 묘지에서는 윤한봉의 미국 밀항을 도운 김은경 목사의 해설이 이어졌다.
윤한봉(1948.2.1~2007.6.27)은 전남대 농대 축산과 재학 중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는 등 세 번의 투옥 이후 1981년 4월 밀항하여 미국으로 망명했다. 윤한봉의 호 ‘합수’는 똥물을 말하는데 ‘가장 낮은 곳에서 퇴비로 산다’의 뜻을 품고 있다.
망명중 재미 한국청년연합, LA 민족학교를 운영하고, 5.18 진상규명 운동 등을 펼친다. 임수경의 평양 방문을 기획하고 지원했다. 그의 미국 망명 생활은 편안한 침대에서 안 자기, 긴장하며 살기 위해 ‘혁대 풀지 않기’ 등 동지들의 죽음을 뒤로하고 망명한 멍에를 지고 살아가는 통한의 시간이었다. 1993년 12년 만에 광주로 돌아와 5.18 기념재단과 민족미래연구소 설립을 주도하며 5.18 정신 계승을 위해 노력한다.
전남대는 농업생명과학대학 앞에 윤한봉 정원(합수 정원)을 조성하고, 농업생명과학대학 2호관 205 강의실은 ‘합수 윤한봉 기념 강의실’이라고 명명했다.
◇윤한봉의 묘 앞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임낙평 들불열사기념사업회 이사장(왼쪽)과 전남대 윤한봉 기념 강의실 명패(오른쪽)
서울에서 광주로 내려가 총격에 숨져
▶한신대 79학번 류동운
◇류동운의 묘
묘역번호 1묘역 2-45에 안장된 류동운(1961.1.3~1980.5.27)은 한국신학대학(79학번) 2학년에 재학 중 비상계엄과 휴교령이 내려지자 서울에서 부모님이 계신 광주로 향한다. 그는 5월18일 계엄군에 잡혀 심한 고초를 당하고 5월20일 풀려난다.
풀려나자 다시 금남로로 향한 그는 5월26일 오전 도청 사수 중 잠시 외출하여 주변을 정리한 후 ‘나는 이 병든 역사를 위해 한 줌의 재로 변합니다.’라는 일기를 남기고 도청으로 들어가 투쟁하던 중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총격에 숨졌다.
그 이름 석자가 칼이요, 시였던 혁명 시인
▶전남대 민주길의 김남주 뜰
◇전남대 민주길에 있는 김남주 기념홀.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근대문화유산이다.
전남대 민주길에는 김남주(1945.10.16~1994.2.13) 관련 김남주 뜰, 김남주 기념홀(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이 있다. 김남주 뜰의 현판에 적힌 <그 이름 석 자가 칼이요, 시였던 혁명 시인>이란 부제는 공감과 가슴 치는 격정의 시간이 오버랩된다.
김남주가 남긴 510여 편의 시중 360여 편이 옥중에서 쓰였다. 그의 시들은 반독재 투쟁의 현장에서 민중의 구호와 노래가 되었다. 김남주 뜰앞의 대형 동판에 새겨진 그의 시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앞에서 순례객들은 함께 노래 불렀다. 이어 5.18 광장, 대형 벽화 ‘광주민중항쟁도’ 등 전남대 민주길을 걸었다.
이번 씨알순례길은 당시 광주 시민들과 전남대 학생들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어떻게 겪어냈는지 되짚어 보는 시간이었다.
40여 년 만에 찾은 광주에서…
5.18을 기억하는 사람 중 마음의 한편에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40여 년 만에 찾은 광주는, 전남대학교는 그 시절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동안 광주를 둘러싼 지역을 가면서도 광주에 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직도 나는 마음 한편에 둔 빚을 갚지 못한 것일까!
◇전남대 5.18광장에 걸린 대형 벽화 ‘광주민중항쟁도’ 앞에서 순례단이 다함께 포즈를 취했다.
월간 문익환_<현장탐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