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석 모란공원 전태일 묘소 앞에서 노래하는 문익환 목사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문익환 목사는 아내 박용길 장로와 함께 전태일 열사가 누워있던 병실을 방문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문 목사의 회고처럼, 이 경험은 그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의 절박한 삶을 직시하게 만든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전태일의 죽음을 통해 노동자와 청년의 고통을 자신의 신앙과 시, 그리고 실천 속에 담기 시작하였다. 문익환은 이후 노동자 투쟁 현장에 직접 나섰고, 청계천 미싱사들의 삶을 시로 옮기며 그들의 목소리를 세상에 알렸다. 시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는 청계천 미싱사로 대표되는 여성 노동자의 절박한 심정을 담아낸 작품이다.
“사실 70년대는 인권 운동의 시대였지요. 그 인권 운동의 발화점은 물론 전태일이었구요. …이땅의 지성인들의 눈을 뜨게 했죠….70년대 민족사의 새 장을 연 것이 전태일이었다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지요.” (1992.2.24)
전태일의 불꽃은 안온한 강단에 머물러 있던 지성인들에게 산업화가 드리운 어두운 그늘과 마주 서게 하는 양심의 회초리였다. 그의 희생은 이후 전개된 한국 인권 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출발점을 제시하였다.
“정치적인 민주화만 가지고는 안된다는 것이 분명히 보이기 시작한 때였지요. 급속도로 건설되어 가는 산업화가 몰고 올 노동자들의 생존권 문제가 심각해지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환했거든요. 그래서 부익부 빈익빈의 경제 부조리를 시정하려는 것이 선언문의 둘째 대목이었지요. 역시 전태일 충격이 나의 눈을 경제문제에 돌리게 한 것이 아닌가 싶군요.” (1992.2.25)
전태일이 외친 것은 오직 노동자의 생존권이었지만, 문익환 목사는 그 절규 속에서 ‘민주화’ 운동이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경제 정의라는 본질을 포착하였다. 이 깨달음은 1976년 3.1구국 선언의 핵심에 경제 정의가 포함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전태일의 죽음은 단지 노동 해방을 위한 것이었으나, 그 불티는 놀랍게도 민족의 모든 해방 운동으로 번져나갔다. 문 목사는 전태일 희생의 본질이 모든 투쟁의 핵심임을 강조한다.
전태일은 민주도 통일도 자주도 외치지 않았죠. 오직 공순이들, 공돌이들의 생존권, 오로지 그것만을 위한 죽음이었는데, 그 불티가 번지다 보니 그게 민주화의 불길, 통일의 불길, 민족자주의 불길로 번진 것 아닙니까? 민주도 자주도 통일도 그 핵심은 그 본질은 공순이, 공돌이가 대표하는 민중의 생존 자체라는 것을 뜻하는 것이죠.” (1989.9.22)
양심이란 남의 아픔을 아는 마음으로 반드시 사회적인 분석 비판 종합을 해낼 수 있어야 개인적인 도덕적인 감성에 빠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통찰력으로 역사를 살아야 한다고 하였다. 역사를 산다는 것은 우리 역사에 지금 주어진 과제가 무엇이냐, 그 과제를 하나하나 풀어가는 것이 역사를 사는 것이라고 하였다. 나라를 잃었을 때는 독립운동을 독재정권 하에서는 민주화운동을 분단 조국에서는 분단을 극복하는 일이 과제였다.
평생을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헌신한 두 분의 삶이 남긴 교훈은 명확하다. 지식과 믿음은 현실의 고통과 연대할 때 비로소 가치를 얻으며, 가장 낮은 곳을 향하는 실천만이 거짓을 이기고 역사를 진보하게 한다는 것이다. 문익환의 양심처럼, 우리 역시 안일함에서 벗어나 시대의 부조리에 응답하며 ‘전태일의 원점’을 잊지 않는 치열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글:오남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