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아카이브 5주년>

늦봄아카이브 오늘이 있기까지: 문영금 통일의집 관장 (2025년 12월호)

박용길이 살아서 아키비스트와 함께 했다면…

 
◇통일의집 거실에 걸려있는 문익환 목사의 판화 앞에서 작품을 설명하고 있는 문영금 통일의집 관장.
 

박용길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 유품 정리 생각

나의 어머니 박용길이 살아계실 때 통일의 집은 온 집안에 빽빽하게 유품이 전시되어 있었고 박스와 책꽂이에도 자료들이 쌓여있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 그동안 간직하셨던 유품들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하셨다.

어머니는 신학서적들은 한신대에 기증하시고 민주화운동 관련자료 등은 당시 문익환 목사의 기념사업을 하던 통일맞이를 통해 민주화기념사업회(이하 민기사)에 기증하셨고(2002), 문 목사 옷들은 가족과 친지들에게 나누어 주시기도 하였다. 바자회에 붓글씨나 두루마기를 내놓아 파시기도 했다. 그때 한 바자회에 내놓았던 두루마기는 우원식 국회의장의 아내 신경혜 님이 구입했고 최근에 기념사업회에 다시 기증해 주시기도 했다.  

어머니와 내가 정리하기에는 사료와 유품들이 너무 많았고 하는 방법도 몰라 역부족이었다. 나는 좀 더 체계적으로 자료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에 민기사에 연락하여 자료 정리를 부탁하였다.

민기사에서 사료를 담당하던 홍계신 선생님과 직원들이 일주일 동안 와서 관련자료 수십 상자를 싣고 갔다. 나는 자료들을 보내며 스캔과 목록화 작업을 하면 공유받기로 하고 유품은 우리가 나중에 박물관을 할 수도 있으니 필요할 때 찾아오기로 하고 위탁 형식으로 맡겼다(2004, 2009). 민기사에서는 김근태의 아내인 인재근과 딸 김병민을 집으로 보내 박용길의 사진설명을 적고 녹화도 하였다. 그때 사진설명만 듣고 유물 설명을 녹화를 해 놓지 않은 것이 두고 두고 후회가 된다. 유물에 얽힌 사연들을 이제는 알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통일의집에 방문한 손님에게 유물을 소개하는 박용길 장로(2004)

  

박용길이 모은 자료로 탄생 100주년에 박물관으로 재개관 

박용길은 정말 많은 자료를 모아놓았다. 1940년대 두 분이 주고 받았던 연애 편지부터, 북간도 명동촌 시절 사진, 각종 성명서들과 갈릴리 교회 주보 등 다양한 행사프로그램들, 문 목사의 설교노트와 원고들과 저서들. 사소한 것 하나도 버리지 못하고 모아두시는 성격이셨다. 

감옥에서 온 문익환 목사의 편지 800여 통과 당신이 감옥으로 보낸 편지 2300여 통을 날짜순으로 파일에 넣은 앨범과 주제별로 제목을 붙인 사진첩이 수십 권이었다. 우리의 대표 유물인 이 편지들과 앨범들을 것을 2023년도에 국가지정기록물로 등록하였다. 

2011년 박용길 돌아가신 후 2018년 문익환 통일의집을 박물관으로 재개관 하였다. 이때 우리는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자료 정리를 어떻게 해야할지 고심이 깊었다. 이때 이연창 소장이 한국문헌정보기술 대표로 있었을 때 임종철 이사와 직원들이 와서 유물을 박스에 넣어서 이웃에 있는 한신대 수유리 캠퍼스 임시 수장고에 옮겨주었다. 체계적으로 정리를 할 수는 없었지만 거실 한 벽면에 위치해있던 물건들을 사진찍고 리스트를 만들어 한 박스에 넣는 식으로 정리해 이후 찾을 수 있게 하였다. 눈이 내린 추운 겨울날 박스를 싣고 한신대 강의실로 옮기던 날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한국문헌정보기술에서는 그 이후에도 박물관 훈증소독이나 보존용품 지원으로 도움을 주셨다. 
 
◇통일의집 박물관 복원공사를 위해 사료가 수장고로 이사하는 날(2017. 12. 28)
 

유물 이전과 개관전 개막에는 김민정 학예사가 큰 역할을 했다. 박물관 재개관을 앞두고 심하게 훼손된 붓글씨 액자와 피아노, 문익환 목사님의 의류 등을 선별하여 보존처리 또는 복원하였다. 석주선기념박물관의 채정민 선생님과 복원가 김겸, 자개 전문가 배근혁님이 도움을 주셨다. 
 
그러나 대부분의 자료들은 목록화 되어 있지 않아 수량조차 파악이 불가능했다. 민기사에서는 자료를 스캔만 했지 분류는 되어있지 않았고 그나마 민주화운동 부분만이어서 통일운동이나 기독교, 가족역사등은 손도 대지 못했다. 이 일을 하려면 비용도 엄청나고 인력도 필요한데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문익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복원공사를 마치고 개관식을 개최한 통일의집(2018. 6. 1)
  
 

민주화기념사업회 지원으로 아카이브 작업 착수

다행히 민기사 프로젝트로 3년간 지원을 받아 자료 목록화 작업을 착수할 수 있었다. 그때 연세대 박물관 이원규 선생님의 소개로 오명진 교수가 파트타임 직원으로 들어와 늦봄 문익환 온라인 아카이브를 함께 만들었다. 오명진 아키비스트와 함께 온라인 아카이브를 어떻게 만들지, 키워드를 어떻게 잡을지 등을 놓고 많은 토론을 거치며 서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아카이브 웹사이트는 아카이브센터의 도움으로 구동할 수 있었다. 
 
2020년에는 창동에 있는 50+서울 북부 캠퍼스에서 통일의집과 함께 하는 디지털 기록지원단 교육 강좌를 개설하여 두 차례 교육을 시켰다. 이때 수강했던 분들이 자원봉사자로 오셔서 5년째 사료정리와 월간 문익환 제작을 맡아주셨다. 오명진 교수 제자들이 실습을 나와 배우면서 손을 보태기도 하였다.
 
오명진 교수 뒤를 이어 박선정 아키비스트가 오셔서 4년간 수고해주셨다. 박선정 아키비스트는 월간 문익환을 만드는 콘텐츠 플러스팀과 자원봉사자들을 빈틈없이 챙기며 월간지가 33호와 <어쩌다 문익환>이라는 자원봉사자들의 경험을 담은 단행본이 나올 수 있도록 윤활유 같은 역할을 하였다. 또한 <고마운 사랑아, 문익환 통일의집 기증기록전>과 <문동환 문혜림 기억전: 움직이는 공동체> 등 여러 전시와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하였다. 여러차례 외부에 나가 늦봄 문익환아카이브를 알리고 교육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제 우리 아카이브는 새로 생기는 민간 아카이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자 벤치마킹하러 오는 곳이 되었다.  

 
 

2025년 11월부터 김가영 아키비스트가 새로 왔다. 3대 아키비스트로 부담감도 있겠지만 젊은 패기로 참신하고도 신선한 변화를 만들어가리라고 믿는다. 부디 오랫동안 함께 해주셨으면 좋겠다. 여기에서 다 말하지 못했지만 정말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우리 아카이브도 이제 조금씩 틀을 갖추어 가는 것 같다. 월간 문익환도 3 시즌 동안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아카이브에서 발굴한 내용으로 문익환과 사료들을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다. 
 
전에는 무엇 하나 찾으려면 몇시간을 컴퓨터와 자료들을 뒤졌는데 이제는 아키비스트에게 부탁하면 금방 찾아준다. 아직도 목록화 되어있지 않고, 위치를 알 수 없는 자료들이 많이 남아있다. 또한 한신대에서 빌려주시는 공간이 더 없이 감사하지만, 아무래도 강의실이다 보니 추위와 더위와 습도 변화에 취약한 상태이다. 소중한 자료들을 항온항습이 되는 공간에 보관해야하는 숙제도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9여년간 많은 일들을 이루었고, 이뤄져 가고 있어 기쁘다.

 

박용길과 함께 작업한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수고해 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특히 아키비스트 오명진과 박선정의 열정과 헌신이 없었으면 결코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랑의 기록가였던 나의 어머니 박용길이 기록학을 공부해서 아키비스트가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아니면 아직 살아계셔서 아키비스트들과 함께 아카이브 작업을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가끔 나는 꿈 같은 생각을 해본다. 
 
◇ 박용길 장로가 전시한 흔적을 유지한 예전 통일의집 모습(2017.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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