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아카이브 5주년>
늦봄 아카이브와 나: 조만석 (2025년 12월호)
아카이브, 늦봄을 만나는 가장 즐거운 ‘놀이터’
▲낯선 단어가 ‘배움터’가 되기까지
‘아카이브(Archive)’.
이 낯선 단어가 제 삶 깊숙이 들어와 비로소 그 뜻을 피워낸 건 늦봄문익환아카이브 덕분입니다. 30여 년 전 직장 생활을 하며 무수히 스쳐 지나갔던 건조한 단어였지만, 그때는 미처 몰랐습니다. 늦봄아카이브를 만난 지 어느덧 4년, 기록물과 공간으로서의 아카이브는 저에게 설렘 가득한 ‘즐거운 배움터’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월간 문익환’ 제작팀으로서 ‘시 속의 인물’ 시리즈를 23회나 연재했습니다. 늦봄의 시구 하나하나를 이정표 삼아 한국 현대사의 굴곡진 인물들을 처음으로, 혹은 새롭게 다시 만나는 여정이었습니다. 그분들의 치열했던 삶, 헌신과 희생의 내막을 깊이 들여다볼 때마다 제 마음은 자주 울렸고, 또 시려왔습니다.
◇조만석 선생님은 뛰어난 한자 능력을 바탕으로 40~50년대 암호문 수준의 편지를 거의 ‘해독’하는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다. 『월간 문익환』에서는 <시 속의 인물>, <늦봄의 말과 글> 등을 연재하고 있다.
▲오해의 벽을 넘어 진실과 마주하다
늦봄의 시가 아니었다면 영영 닫혀 있었을 제 마음의 빗장을 열어젖힌 분, 바로 조화순 목사님입니다. 늦봄의 시 제목은 ‘나는 보았다 – 조화순 목사에게 바치는 시’였습니다. 처음 듣는 낯선 이름에 난해한 시 내용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요. 그래서 검색창을 두드렸습니다. 아, 그런데 먼저 눈에 뜨인 단어는 ‘인천도시산업선교회’와 ‘동일방직’이었습니다.
◇ 문익환 목사 석방 환영 모임에서의 조화순 목사(1993년 3월)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도산(都産)’이라 불렸던 도시산업선교회. 고등학교 시절 뇌리에 박힌 강렬한 낙인이 즉각적으로 떠올랐습니다. 흑백 TV 화면 위로 섬뜩하게 찍혔던 자막, ‘도산(都産)이 들어오면 기업은 도산(倒産)한다’라는 문구가 어제 일처럼 생생히 되살아났습니다. 아마 동일방직 투쟁이 한창이던 시절이었겠지요. 독재 권력과 언론은 산업선교회를 ‘노동자를 포섭하여 의식화하는 공포의 존재’로 호도했고, 그 거짓된 프레임은 어린 제 머릿속에 공포로 각인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외면하고 싶은 두려움’
대학 시절, 도시산업선교회와 노동자가 연관된 시위에서 주변을 서성이다 사복전경들의 거친 손아귀에 걸려들었습니다. 다행히 연행은 피했지만, 지인 2명은 정학을 당했지요. 식겁했던 그날 밤의 트라우마로 인해 크리스천이 아니었던 저에게 산업선교 활동은 오랫동안 ‘외면하고 싶은 두려움’ 그 자체였습니다.
하지만 40여 년이 흘러 아카이브에서 뒤늦게 발견한 늦봄의 시는 그 어둠을 가르는 한 줄기 빛이 되었습니다. ‘시 속의 인물-조화순 목사’ 편을 집필하며 조 목사님의 저서와 동일방직 투쟁의 피어린 증언들, 그리고 여전히 공장 앞에서 복직을 외치는 사람들을 마주하게 되었으니까요. 아카이브 속의 기록들은 제 안의 편견을 산산조각 냈습니다.
그 깨달음의 연장선에서, 지난 9월 영등포산업선교회 손은정 목사님의 강의(통일의집 영성프로그램)에 참여했습니다. 노동자를 향한 늦봄의 시를 함께 낭독하고 감상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현장을 지키는 손 목사님을 통해 ‘노동자를 향한 늦봄의 애끓는 마음’을 생생히 느끼고, 손 목사님 자신의 ‘각성’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문 목사님이 들었던 70년대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절규’를, 손 목사님은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아들을 잃은 ‘김용균 어머니의 절규’로 대입하여 말씀하시더군요. 또, 45년 전 하루 16시간 뼈 빠지게 일해야 했던 화물터미널 노동자 정병환 씨의 고단함은(시 ‘정병환 씨’, 1980), 오늘날 새벽 배송을 하다 쓰러지는 택배 노동자의 죽음과 다르지 않았고요.
강의를 듣는 내내, 그동안 제가 늦봄의 시를 수박 겉핥기로 읽었다는 부끄러움이 밀려왔습니다. “책을 백 번 읽어 뜻을 깨친다”라는 옛말처럼, 늦봄의 시를 읽고 또 읽어 그분의 마음 깊은 곳으로 한 발 더 들어가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사료 하나하나가 내겐 살아있는 스승”
늦봄이 남긴 단 한 편의 시에서도 저는 인생의 교과서를 발견합니다. 시의 배경이 된 그 시절의 암울함, 그 인물이 감내했던 고통을 되새김질합니다. 그리고 그 과거가 여전히 되풀이되는 오늘을 아프게 성찰하게 됩니다.
늦봄이 남긴 400여 편의 시와 800여 통의 옥중 편지, 그리고 박용길 장로님의 3,000여 통의 편지. 아카이브의 이 방대한 사료 하나하나가 제게는 살아있는 스승입니다.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나이, 배워도 지식으로 쌓이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도 있지만, 문익환 전집 수필 편에서 만난 구절이 저를 따뜻하게 위로합니다.
읽고 잊고, 읽고 잊으면서도 읽는 일은 여전히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잊혀진다는 것은 읽은 것이 잠재의식 속으로 두엄처럼 녹아들면서 나의 세계를 풍성하게 만들 수도 있거든요. (문익환, 1999. 「감옥에서 깨달은 생명에 대한 외경」)
감옥에서 수없이 책을 읽어도 기억에 남는 게 없어 시큰둥했다던 늦봄조차, 결국엔 그것이 ‘나의 세계를 풍성하게 하는 거름(두엄)’이 됨을 깨달으셨다니! 이 얼마나 신나고 반가운 위로인가요.
▲과거와 현재가 대화하는 보물창고
이처럼 아카이브에서 늦봄의 말과 글을 만나는 일은 그 자체로 가슴 벅찬 즐거움입니다. 더 나아가 ‘월간 문익환’이라는 콘텐츠를 통해 더 많은 이들이 늦봄을 친근하게 만날 수 있도록 돕는 작업에 동참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을까요.
지난 가을, 인터뷰에서 “나에게 수장고(늦봄문익환아카이브)는 OOO이다?”라는 돌발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급히 이렇게 얼버무렸죠. “직장 생활 30년만큼이나 보람을 느꼈던, 지난 3년의 일터.”
자원봉사 중인 늦봄문익환아카이브가 어떤 곳인가 다시 생각해 봅니다. 현재의 우리를 위로하고, 미래를 꿈꾸게 하는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놀이터’이자 ‘보물창고’임에 틀림없습니다.
늦봄문익환아카이브 5주년, 이 보물창고의 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곳에서 ‘두엄’처럼 삶을 풍성하게 할 보물 하나쯤 찾아보시는 건 어떨까요?
[참고 문헌]
문익환 (1999) 『문익환 전집』6 수필. 사계절출판사
월간 문익횐_<아카이브 5주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