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늦봄의 말과 글>

옥중 편지로 되짚어본 3·1민주구국선언(2026년 2월호)

50년 전, 죽음을 넘어선 부활의 선언

 
◇’장준하 선생을 추모하는 밤’ 행사에 참여해 만세를 부르는 함석헌 선생의 모습. 그 뒤에 문익환 목사가 나란히 강단에 서있다.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여섯 번째 수감 중이었던 1992년 2월, 늦봄은 회고담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16년 전 '3·1민주구국선언'을 하게 된 배경과 진행 경과를 옥중 편지에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이 편지들을 통해 50년 전, 암흑 속에서 희망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그날의 뜨거운 심정을 되새겨봅니다.

 

‘이 암흑기에 할 일을 찾아라’ 

▲ 선언을 쓰게 된 직접적 계기



1976년 2월, 성서 번역에 몰두하던 문익환 목사의 방에는 장준하 선생의 사진이 걸려 있었습니다. 달력의 붉은 날짜가 늦봄의 가슴을 찔렀던 그날의 기억입니다.
 
성서 번역을 하는 나의 방에는 장준하 씨의 큰 사진이 액자에 담겨 걸려 있었죠. … 2월 들어선 어느 날, 달력의 3월 1일이 빨간 글씨로 나의 눈을 콕 쏘았어요.
 “3·1운동 68주년이구나. 이 시점에서 준하 네가 살았다면 뭘 할 거냐?”
 나는 그의 훤한 모습을 쳐다보며 물었어요. 때마침 『씨알의 소리』(2월호였겠지요)가 보여 펼쳐 보았더니, 거기 「한국 외교의 나아갈 길」이라는 장준하 씨의 글이 실려 있더군요. 단숨에 읽었지요. 전적으로 공감하면서. … 이 암흑기, 이 침묵기에 민족사의 미래를 제대로 바로 말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기록이라도 남겨야 하겠다는 생각이었죠.
(2월 21일 편지) 


 

전태일의 불꽃에서 통일의 길까지 – 

▲ 선언문에 담은 핵심 사상



늦봄은 선언문에 ① 민주화, ② 경제 정의, ③ 통일이라는 세 가지 대원칙을 담았습니다. 특히 민주주의가 사람의 삶(생존권)을 지켜내는 체제여야 함을 강조한 것은 전태일 열사의 영향이었습니다.
 
70년대 민족사의 새 장을 연 것이 전태일이었다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지요. 전태일은 청계천 평화시장의 공순이·공돌이들의 생존권 이외에 관심이 없었지요. 이 아우성이 … 이 땅의 지성인들의 눈을 뜨게 했죠. … 정치적인 민주화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이 분명히 보이기 시작한 때였지요.

정치적인 민주화도, 경제 정의도, 통치자에게 독재의 구실을 제공해 주는 분단의 극복 없이는 해결의 길이 없다는 것 또한 분명해지기 시작했죠. 통일이 모든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됨과 동시에 모든 문제의 해결은 통일문제의 해결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 뚜렷해졌죠
(2월 24-25일 편지)
 
 

선언은 혼자 쓰지 않는다 

▲ 긴박하게, 그러나 현실감 있게.



늦봄은 백기완 선생과 의기투합하여 초안을 작성한 뒤, 문동환, 함석헌, 이우정, 이태영 선생 등과 긴밀히 협의했습니다. 특히 안국동(윤보선 전 대통령)과의 조율 과정에 대한 회고는 당시의 긴박함 속에 숨은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줍니다.
 
김대중 씨가 기초한 것이 소극적이어서 윤보선 씨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나는 나의 선언문에 유신헌법 철폐, 긴급조치 해제, 구속자 석방을 적당한 자리에 써넣어서 안국동으로 갔지요. 그러다 보니, 이 세 가지 구체적인 요구 사항은 문맥 전체의 흐름에서 보면, 걸맞지 않게 억지로 들어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거예요. (3월 2일 편지)
 
 

서명자의 본류는 갈릴리교회  

▲ 행동하는 신앙인들의 결단



3.1민주구국선언 서명자 10명은 모두 기독교계 인사들이었습니다. 그 본류는 1975년 8월 17일, 장준하 선생이 세상을 떠난 바로 그날 창립된 ‘갈릴리교회’가 있습니다.
 
갈릴리교회 창립 멤버 안병무, 서남동, 이문영, 이우정, 문동환이 다 서명자 명단에 들었는데, 거기 들지 못해 서러워하면서 눈을 감으신 이해영 목사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찡하군요. 심장이 너무 병약해서 빼 드린 건데… (2월 27일 편지)
 
 

떨리는 목소리, 장준하를 살려낸 듯

▲ 3월 1일 명동성당



마침내 3월 1일 명동성당, 이우정 선생의 목소리로 선언문이 낭독되었습니다. 늦봄은 그 순간을 '친구와의 약속을 지킨 순간'으로 기억합니다.


우리 겨레는 월남 사람들처럼 불행한 선택을 강요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절박감과 장준하의 목소리를 되살려내야 한다는 강박감으로 쓰여진 선언문이 이우정 씨의 떨리는 목소리로 낭독되어 내려가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 속으로 뜨거운 눈물을 안 삼킬 수 없었죠. 장준하 씨의 생명이라도 살려낸 것 같은 마음이 들어 이만하면 내가 할 일을 해냈지 싶은 흐뭇한 심정이 되기도 했구요. (2월 29일 편지)
 

 
◇3.1민주구국 사건으로 군사재판을 받고 있는 문익환 목사와 김대중 전 대통령.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독재 정권의 패착과 민주화의 연대 

▲ 갈라치려다 하나 되게 만든 역설



박정희 정권은 서명자 외에 김지하 구명운동을 하던 신부들까지 엮어 일망타진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늦봄은 이를 정권의 치명적인 자충수, 즉 '과수(過手)'였다고 회고합니다.
 
이것은 신·구교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정부 운동에 한꺼번에 결정적인 일격을 가하려는 데 그 의도가 있었던 것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러나) 신교와 구교를 민주 통일 전선에서 하나로 굳게 묶어 주는 결과가 되었죠. 그것은 바둑에서 흔히 말하는 과수(過手, 지나친 수)였죠. 그만큼 정부는 그때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죠. (2월 26일 편지)

 
◇3·1구국선언사건으로 수감(1976.3~1977.12) 후 석방된 문동환, 이문영, 서남동, 문익환의 환영예배(1978. 1)
 
 

 "벽을 문으로 알고 박차고 나가면, 그때부터 벽은 문이 된다."

▲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3·1민주구국선언은 늦봄 문익환이 온몸으로 보여준 이 교훈의 가장 극적인 증거였습니다. 50년 전 3월, 늦봄은 침묵의 벽을 박차고 민주와 통일의 문을 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문 앞에 서서 다시 묻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글 : 조만석>


[참고문헌]
문익환 옥중 편지 (1992년 2~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