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보내는 행복론

아버님, 어머님께

 

(7월4일) 금년도 벌써 반이 지나갔군요. 세월이 이렇게 빨리 지나간다고 느낀다는 것은 저의 ‘빵잡이 살이’가 결코 따분하고 지루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결코 자유를 박탈당하고 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저의 자유는 저와 함께 여기 들어와서 저에게 충분한 자유를 누리게 해 주거든요. 그런데 저는 요새 생활이 아쉬워지는 느낌입니다. 자유는 지천으로 있는데, 생활이 없다는 느낌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하시겠지요. 나를 따라 들어와 나에게 충분한 자유를 주는 자유는 어디까지나 나의 자유입니다. 그런 자유가 주는 삶은 또 어디까지나 나에게 한정된 삶이구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지금 아쉽게 생각하는 삶은 남과 함께 사는 삶, 남을 위해서 사는 삶이지요. 진정한 생활이란 그것인 거지요. 그것이 없는 믿음은 생각 속에서 맴도는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저는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생활이 없는 기도 –– 수도승이 깊은 산속에서 세상과 유리되어 드리는 기도 –– 그것이 아무리 열렬한 기도라고 해도 저는 그런 기도에서는 하느님의 몸과 마음을 느낄 수 없을 것만 같습니다. 저는 지난 21일 새벽에 이것을 의심할 여지없이 깨우쳐 주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저는 대학생들의 모임에 강사로 초청되어 가서 저녁을 간부들과 같이 먹게 되었습니다. 저더러 기도하라고 해서 식사 기도를 하는데 웬 학생이 들어오면서 큰 소리로 우리를 뭐라고 놀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를 제지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를 중단하고 그 학생에게 앉으라고 했는데, 그 학생은 더 큰 소리로 비웃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아무도 그를 제지하거나 사과하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는 모든 사람에게 조롱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그 자리를 차고 일어서면서 나오려고 하다가 꿈을 깨었던 것입니다.

그때는 그 꿈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잘 몰랐었는데, 차츰 저는 그 뜻이 생활이 따르지 않는 믿음, 기도는 공허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여기서 깨친 것들이 아무리 하느님 마음의 어느 작은 한 면을 깨친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생활이 되지 않으니까, 그것은 한낱 공허한 관념의 유희가 되어 버린 거죠. 그렇게 되면 그것은 저를 속이는 거짓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 학생은 저의 이 거짓을 빈정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 학생은 저 자신의 양심이지만요. 히브리인들은 거짓말을 빈말이라고 합니다. 공허가 곧 허위인 거죠. 빈말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중성적인 것이 아닙니다. 빈말, 공허가 곧 허위요 악입니다. 신학을 생활을 떠나 책상 위에서 학문으로, 곧 직업으로 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것이냐는 것을 뼈에 사무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앞이 캄캄한 전과자들을 위해서, 가난한 농·어민, 탄광 광부, 쪼깐이들을 위해서, 나라와 겨레를 위해서 아무리 기도해 봐도, 제가 지금 느끼는 공허감은 좀처럼 채워질 것 같지 않습니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까 저의 이 공허감이 하느님의 공허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의 신앙이 교회의 울타리에 갇혀서 빈말이 되어 버릴 때, 신앙이 곧 생활이 아닐 때, 제가 지금 느끼는 공허를 하느님도 느끼고 계시는 것이 아닐까요? 저의 공허 속에서 무한대한 우주로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로 임재하시는 하느님을 경험하는 것일까요? 임마누엘은 허허한 나의 이 공허 속에도 계시는군요.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여기까지 쓰고 나니 더 쓸 수 없는 심정입니다.

딸기를 잡수시는 아버님, 어머님의 모습이 정말 보기 좋습니다. 의젓한 증손녀 보라는 이제 아기 티를 벗었군요. 받는 기쁨만으로 살던 아기더니, 이제 무언가 자기 아닌 남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같이 느낄 수 있는 ‘마음’이 밝은 두 눈에 호수처럼 담겨있는 것 같군요. 바우의 사진과 비교해 보았더니, 그렇게도 둘이 닮았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닮은 것이 마음의 닮음에서 풍기는 분위기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의 가슴의 공허가 하느님의 공허의 울림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 이 편지가 아버님, 어머님, 그리고 온 친지들에게 기쁨이 되기를 빌면서 오늘은 이만 붓을 놓겠습니다. 또다시 할렐루야! 이렇게 오늘 하루가 보람찬 성일이 되었습니다.

아들 드림

 

당신에게

 

(7월6일) 이건 정말 너무 가무는군요. 우리 집 물이 딸린다는 말을 듣고 가뭄을 실감했었는데, 요새 한창 시끄러울 개구리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아서 또다시 가뭄을 실감하게 되었구려. 금년 또 흉작이 되면 비단 농부뿐만 아니라 전 국민이 겪어야 할 어려움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군요. 얼마 전 『문예춘추』에서 미국 하바드대학 경제학 교수와 일본의 경제인이 21세기를 내다보면서 대담한 것을 읽었는데, 거기서 두 사람이 똑같이 강조한 것이 에너지 문제와 식량 문제이더군요. 식량까지 외국에 의존하게 되어서는…….우리도 이제 농촌 문제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할 것 같군요. 식량 자급자족에는 못 미치더라도 외국 양곡 의존도를 줄여 가면서 농민들을 살찌우는 정책으로 차츰 정책 전환이 있어야 할 텐데……. 농민들에게 구매력이 생겨야 대기업들이 살 거고, 그 사이에서 중소기업도 물론 살 거구요.

6월호 『기독교 사상』에서 농촌 선교에 관한 대담을 잘 읽었어요. 때를 잘 맞춘 기획이라고 생각되었소.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전민족적인 차원으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는 점이랄까. 농촌 선교가 되려면 농촌 경제가 개선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실감시켜 주는 대담이었소. 그런데 통일이 되지 않으면 모든 경제 문제가 풀릴 길이 없다는 것, 따라서 농촌 문제도 근본적인 해결의 길이 막막하다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고 봐요. 그렇다고 통일이 되기까지 농촌 문제는 포기해야 한다는 말인가요? 절대로 그럴 수 없어요. 왜냐하면 피폐한 농촌은 통일의 관문을 가로막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기 때문이오. 농촌 경제의 재건은 농촌 표를 우리 편에 묶어 두어야 한다는 전략적인 차원의 문제에 멎는 것이 아니에요. 가난한 농촌은 우리가 통일을 향해서 결정적인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돼요. 그 점에 있어서 산업선교도 똑같은 거죠.

그러나저러나 우선은 비부터 와야 할 텐데 정말정말 걱정이군요. 며칠 있으면 우리 예쁜 조카 영미를 만날 생각을 하니 지금부터 가슴이 울렁이는군요. 신철 아빠가 조금씩 나아간다는 소식 기쁘군요. 문안해 주시오. 당신을 기다리던 영금이 실망이 크겠군요. 한번 휙 떠나서 바람이라도 쐬고 돌아올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영금아

 

오늘이 네 생일이구나. 너는 나를 닮아서 좀 까다로운데, 어쩌다가 그렇게 마음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사는지, 너를 보면 나는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할아버님은 네가 그렇게 좋은 아내가 되어 집안을 행복하게 꾸려나가는 것을 보고 퍽 기뻐하신다. 나도 그렇지만 할아버님도 안심하신 거지. 안심 정도가 아니라 자랑스럽게까지 생각하신단다. 난 네가 얼마나 좋은 아내요 엄마 노릇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네가 정말정말 마음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한 것이 그냥 고마울 뿐이다. 나는 네가 지금 어떤 좌절감에 빠져 있는지 알 것 같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너는 긴장이 되어 있으리라는 것도 잘 안다. 넌 지금 솜같이 부드러운 문칠이 아빠의 가슴에 기대어 모든 긴장을 풀어버리고 한껏 행복하기만 하면 되는 거다. 좋은 일자리를 얻어 아무 걱정할 것 없는 생의 기반을 닦았는데, 무엇이 문제냐? 문칠이 아빠가 교회에서 그렇게 중책을 갖고 활동한다니 얼마나 좋으냐?  둘이 손잡고 남과 함께, 남을 위해서 사는 행복에 흠뻑 젖어라. 은희는 모든 문제는 아이덴티티(identity)라고 했더라만, 난 요새 자기 붕괴야말로 신앙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물론 붕괴할 자기, 곧 아이덴티티의 확인이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붕괴를 위해서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자기, 이건 헬라적인 인생관이라면 붕괴는 성서적인 인생이 아닐까? 너나 고모나 자기 붕괴를 통한 인생 경험을 해야 인생의 참맛을 알게 되리라는 느낌이다.

이슬방울같이 영롱한 자아가 떨어져 땅속으로 스며들어야 풀뿌리들을 타고 올라 아름다운 꽃 속에서 향내로 번질 수 있는 거 아니겠니? 가계부의 대차대조표에도 오르지 않는, 손으로 만져 볼 수도 없고, 볼에 비벼 볼 수도 없는 향내에야말로 인생이 있고 행복이 있는 거 아니겠니? 네 나이 벌써 서른넷이구나. 여유가 생겨도 좋을 만한 때가 되었구나. 부디 이제부터 향내의 여유를 즐기며 남에게도 주는 행복한 하루하루를 네 식구가 오순도순 즐기기를 빈다.

둘째 아기의 탄생을 정말 기뻐하며 축하한다. 엄마가 가서 도와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니? 결혼식도 봐주지 못했고 문칠이 날 때도 못 봐주었는데, 이번만이라도 가봐 줄 수 있었다면 우리도 부모로서 좀 할 일을 한 것 같았을 텐데 말이다. 이럭저럭 부모 된 도리를 못 하는 것 같지만, 어쩌겠니? 용서해다오. 나는 너희들만 생각하면, 죄인이 된 것 같아 용서를 빌고 싶은 심정이다. 그렇게 느끼면서 하느님의 마음도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삼촌네 식구들, 고모네 식구들을 만나 무거운 몸으로 수고도 많겠지만, 쌓였던 회포를 풀 수 있겠지. 그 자리에 낄 수 없는 것이 좀 원망스럽지 않은 게 아니지만, 다시 네 식구의 행복을 빈다.

 

다시 영금에게

 

어제 쓰던 행복론을 계속하고 싶어졌다. 여기는 정말 덥고 가물다. 다행히 이 교도소에선 시원한 물이 무진장으로 나와서 지금도 나가서 한 시간 운동하며 땀을 흘리다가 들어와서 냉수 목욕하고 참외를 깎아 먹고 붓을 잡는다. 행복에 관해서 한마디 더 하고 싶은 것은, 행복이란 움켜잡고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문과 창을 봉하고 한 오리도 새어 나가지 못하게 방안에 가두어 놓고 지키려고 하면 행복이란 썩는다. 행복이란 문과 창을 활짝 열어 헤치고 동네방네로 번져 나가게 해야 하는 거다. 퍼낼수록 맑은 물이 콸콸 솟구치는 샘 같은 거겠지.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 그건 결코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말이 아니다. 기쁨이 솟아난다는 이야기지.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행복을 이야기하는 것은 상가에 가서 히히덕거리는 것만큼이나 죄송스러운 소리 아니겠니? 기쁨과 슬픔의 이율배반 속에서 인류는 어제나 오늘이나 살아가는 거지. 그래서 사람들은 정말 기쁜 일이 있으면 누가 죽기나 한 것처럼 엉엉 우는 거 아니겠니? 남의 불행을 보면서 나의 행복을 고맙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불행을 같이 슬퍼하는 인정 속에서 경험하는 기쁨, 눈물겨운 기쁨이 참 기쁨 아니겠니? 이제 그만.

 

다시 당신에게

 

최근 깊이 깨친 일 가운데 하나는, 예수는 약 2천 년 전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 한 30년 살다가 십자가에서 처형된 한 유대인 청년의 개인 이름에 멎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집합명사라는 점이오. 이것은 성서 해석에 있어서 이미 공지의 사실이 되어 있긴 하지만, 그것이 실생활 속에서 실감되고 있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못한 것이 아닐까요? 예수는 여전히 우리의 기도와 예배의 대상으로 하늘 높이 계시는 게 아닐까요? 우리는 흔히 예수는 고생하는 백성 가운데 와 계시다고 고백하면서 그 무리가 그대로 예수라는 생각은 않거든요. 이를테면 예수가 보이지 않게 영으로 우리 가운데 와 계시다고 생각하는 거죠.

우리는 예수를 영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경험해야 하는 거요. 교회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고백한 초대 교회의 신앙 경험이 그런 거였거든요. 교회가 우리 하느님의 백성을 말하는 것이라면, 우리끼리 얼싸안는 것은 곧 예수를 얼싸안는 일이지요. 예수는 지금 박 아무개, 김 아무개로 이 현실을 살아가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딸인 거죠.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가 그것 아니겠소? 나는 서대문에서 죄수의 모습으로 예수가 내게 나타나신 꿈을 꾸었죠. 그건 내게 정말 계시와 같은 꿈이었소. 또 얼마 전 아침에 요가를 하는데 누군가 아래층에서 혼자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로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를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것이 바로 예수의 목소리처럼 들려오지 않았겠소?

그러나 예수라는 이름이 하느님 백성을 말하는 집합명사라는 것을 나의 몸으로 느껴 깨치게 한 것은 식사 기도의 경험이에요. 밥알 한 톨 한 톨 씹으면서 이건 애타는 농민들의 염원을 씹어 삼키는 것, 나의 몸은 그대로 농민들의 애타는 염원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은 육군교도소에 있을 때부터였지요. 그러던 것이 여기 와서는 그 농민들의 절망에서 우러나오는 염원이 내 몸속에서 하느님의 절망이요, 슬픔이요, 뜨거운 염원으로 화학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이렇게 내 몸속에서 농민들의 절망이 되고 애타는 염원이 되는 거죠.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지만, 이렇게 하느님은 사람이 되시는 거죠. 하느님도 내 몸속에서 당신의 백성이 되는 거죠. 아니, 하느님은 사람들의 몸으로 존재하시는 거죠.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극구 피하고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로 자신을 표현하신 것은 바로 이런 뜻이 아니었을까요? 예수의 몸은 갈릴리의 가난한 농민들의 절망과 애타는 염원으로 살이 되고 뼈가 되고 피가 되는 것이었죠. 그 몸이 곧 하느님의 몸인 거구요. 하느님은 예수의 눈으로 세상을 보시고, 예수의 귀로 당신 백성의 아우성과 한숨 소리를 들으시고, 예수의 발로 걸어 당신의 백성을 찾아가시고, 예수의 손으로 붙잡아주시고, 예수의 가슴으로 안아 주신 거죠. 마침내 예수의 목소리로 당신 백성의 절망을 십자가상에서 외치신 것 아니겠소? 이러고 보면 성찬은 그냥 기념이 아닌 거죠.

그런데 며칠 전에 마태복음 25장을 읽다가 새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소. 첫째, 예수는 하느님의 마음으로 가난한 자를 도와주고 병자를 위문하고 갇힌 자들을 보살피는 사람들이 아니라, 보살핌을 당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 언젠가 서남동 목사님이 착한 사마리아인이 예수인 것이 아니라 불한당 만난 사람이 예수라고 설교하시던 것을 들은 기억이 나는군요. 역시 그 해석이 옳은 거죠. 여기 있는 온갖 흉악범들이 바로 예수라는 말이 되겠지요. 이철용 장로의 소설에 나오는 창녀들, 뚜쟁이, 검은손, 양아치들이 바로 예수라는 말이죠. 둘째, 그들을 하느님의 아들 예수이기 때문에 사랑한다면, 우리 다 염소의 무리가 된다는 사실. 염소들은 그들이 주님인 줄 알았으면 당연히 찾아가서 보살펴 주었을 것이거든요. 양의 무리들은 그런 걸 전혀 몰랐던 것 아니겠소? 그냥 이××가 굶고 있으니 쌀을 갖다주고, 최××가 병이 났다고 해서 위문하고, 공××가 갇혔다고 해서 보살펴 준 거지요. 철저한 비종교적인 휴머니즘이군요.

아, 이걸 어떻게 우리의 생에서 실천할 것인가요? 눈앞이 아찔하군요.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 없이”라는 본 회퍼의 말이 실마리를 풀어줄지도 모르겠군요. 하느님을 의식하지 않고 다만 진정 인간이 되어 인간다워질 때 그것이 실천되는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본 회퍼가 말한 ‘성숙한 인간’이 그런 사람이 아닐까 몰라! 예수가 즐겨 쓴 ‘사람의 아들’이란 말은 ‘사람다운 이’ 곧 ‘참 사람’이라고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요? 『정감록』에서 한국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던 ‘진인(眞人)’이 이와 통하는 것이 아닐까 모르겠군요.

(7월 9일) 이번 편지 내용이 최고로 많아진 것 같군요. 아마 한숨 돌려 가면서 물이라도 몇 모금 마시며 읽어 드려야 할 것 같아 좀 미안한 느낌이 드는군요. 용서. 한 달 동안의 편력을 이 한 장에 다 적는다는 게 애당초 무리인 거죠. 각설하고.

어제 아침 방 걸레까지 치고 성경책 앞에 앉아 하느님의 마음에 내 마음을 열고 고요히 앉았는데 ‘세상에 하느님의 자녀 아닌 사람이 어디 있느냐?’, ‘하느님의 백성 아닌 사람이 어디 있느냐?’라는 소리가 쟁쟁하게 울려와서 소스라치게 놀랐군요. 그 소리의 여음처럼 ‘사탄의 자식이라고 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아닌 거냐?’ 하는 말이 가슴을 때리는 것이었소. 그렇다면 세상에 내가 미워할 사람, 멸시할 사람, 거리를 두고 멀리할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머리를 쳐드는 것이었소. 하느님과 같이 아파하고 슬퍼할망정, 내가 누군데 감히 이 사람은 미워하고 저 사람은 멸시할 거냐는 거죠. 그 사람들이 밉든 곱든 다 하느님의 자녀인데, 나의 형제들인데…….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는 기고만장해서 놀려대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신 예수의 심정이 가슴에 찡하고 전해오는 것 같았군요.

예수가 세리와 창녀들이 하늘나라에 제일 가깝다고 하셨을 때, 그는 세리를 미워할 수 없었고 창녀를 멸시할 수 없는 정도가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지 않소? 당시 유대인들에게 제일 미움받고 멸시받던 사람들이 세리 아니었겠소? 적국 로마에 붙어 거머리처럼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세리들을 뼈를 갈아 먹어도 시원찮을 텐데, 그들이 하늘나라에 누구보다도 먼저 들어갈 거라고 했으니, 삭개오 같은 사람이 체면 불구하고 뽕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를 보려고 한 거 아니겠소. 유대인으로서 세리를 미워하지 않고 멸시하지 않을 수 있다면 미워하고 멸시할 사람이 없는 거죠.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마구 욕을 퍼부어 대던 바리새인들과도 그는 같이 식탁에 앉아 담소하실 수 있었으니까.

오늘 아침에 호세아서를 읽었는데, 배신하는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증오에 찬 저주를 퍼부으시는 하느님의 가슴이 찢어지며 쏟아지는 피의 뜨거움 같은 것을 가슴 아프게 느낄 수 있었어요. 예언서에 가득 차 있는 하느님의 분노는 하느님의 아픔과 슬픔에 부딪힌 예언자들의 너무나 인간적인 목소리라는 걸 느끼게 되는군요.

시편에는 자기를 죽음의 구렁에 차넣는 원수들에 대한 부글부글 끓는 저주가 많이 있지요. 그런 시편들을 어떻게 우리의 기도로 읽느냐는 것이 문제였지요. 그것을 문제로 느낄 만큼 기독교인들은 서러움을 모르는 계층이 되어 있었던 거죠. 나를 포함해서 재소자들의 절망이 조금이라도 가슴에 울려오면 그런 시들도 나의 기도로 실감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 요새는 그런 기도를 들으시는 하느님의 암담한 심정, 찢어지는 아픔, 하늘이 꺼지는 슬픔 같은 것을 조금씩 느끼면서 읽게 되는군요. 저주하는 사람이나 저주를 받는 사람이나 하느님에게는 같은 자녀이거든요.

내일이면 만나겠군요. 영미까지도. 8월 서신 쓰는 날까지 하느님은 또 무엇을 내게 주시려는지?

 

1982.7.9. 사랑

 

생활이 따르지 않는 믿음과 기도의 아쉬움과 공허함을 표현. 둘째를 출산한 딸에게 보내는 행복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