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바닥의 기도

어지나야

 

(11월3일) 세상에 태어나서 두 달째 접어들었구나. 세상 재미란 맛있는 엄마 젖 먹고 자는 재미밖에 없겠지만, 세상이란 한번 살아 볼 만한 곳이란다. 엄마의 눈, 코, 입은 안 보이겠지만 엄마 얼굴 윤곽이라도 희미하게 보이는 것 아니니? 보듬어 주는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들의 품이 과히 나쁘지 않지? 바우, 보라가 불러 주는 노랫소리가 듣기 좋지? 네 얼굴 윤곽은 아빠를 닮았지만 눈언저리는 외할머니를 닮은 것 같구나. 네가 건강하게 훌륭하게 자라 주기를 비는 기도들이 네 영혼 속에는 웅웅 울리겠지. 세상엔 엄마 젖처럼 맛있는 것이 없으니 지금 실컷 먹고 잘 자거라. 아빠보다 더 크고 멋진 사람이 되어라. 

할아버지 

 

당신께

 

손자들을 사랑해 주고 귀여워해 줄 겨를도 없이 그 조그마한 발바닥 자국을 남기며 동분서주하는 당신의 뜨거운 마음이 이 감방 속에 화끈화끈 전해져 오고 있어요. 벌써 11월, 여섯 장짜리 달력 마지막 장엔 예수가 태어난 마구간 그림이 있어요. 내가 지은 성탄 찬송가를 많이 불러 주시오. 10월 편지를 쓸 때까지만 해도 나는 하느님 큰마음이 불길로, 평화로, 누룩으로 오시기를 빌었는데, 그 뒤로 그렇게 빌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소.

오늘 아침 요가를 하다가 무한한 공간 (그것은 하느님의 큰마음이었죠) 안에 작은 점 하나가 뚜렷이 보이더군요. 그것이 나요, 나의 마음이었던 거죠. 그 점이 아침마다 줄어들다가 마침내 그 무한한 공간 속으로 사라져 들어가고 마는 것이었소. 마치 전주에 있을 때 새벽마다 나를 창가로 불러내던 샛별이 쳐다보고 있는 사이에 푸른 하늘 속으로 잦아들며 사라져 버리듯이. 요한복음에는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그 말의 뜻이 이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이 깨달아지더군요. 나의 먼지보다도 작은 마음이 무한하신 하느님의 마음 안에 있는데, 하느님의 마음이 오기를 비는 것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 거죠. 그래서 요즈음 이렇게 기도하게 되었소.

‘큰 마음이시여, 크게 어진 마음이시여. 큰 불길로 타오르시옵소서. 평화로 승리하시옵소서. 누룩으로 번져 나가시옵소서. 고른 이슬로 온 땅을 적시옵소서. 큰 기쁨으로 모든 것을 얼싸안아 주시옵소서. 찢어진 깃발로 펄럭이시옵소서. 큰 슬픔으로 우리를 감싸 지켜 주시옵소서. 아멘. 할렐루야.’

(11월4일) 오늘은 날이 좀 흐릿하군요. 오늘 아침 히브리어 성경 시편 129, 130, 131편, 이사야 17장, 한글 성경 열왕기상 11장 (솔로몬의 허영과 타락이 어떻게 민족에게 비극을 초래했느냐는 기록), 마태복음 17장을 읽고 나와서 붓을 들었소. 요새 아침에 성경을 펼쳐놓고 하느님의 마음이 가슴에 울려오기를 빌면서 어떤 기도를 올리는지 알겠소? 

“큰 마음이시여, 큰 한 어진 마음이시여, 큰 한 맑은 마음이시여, 

큰 한 외로운 마음이시여, 큰 한 슬픈 마음이시여, 이 작은 가슴에 울리소서. 

그 마음, 이 가슴에서 울려내소서. 

땅 끝, 바다 끝, 하늘 끝까지 울리게. 

백두에서 한라까지 온 강산 굽이굽이 메아리쳐 울리게. 

그 작은 가슴 품에 울려 참새들도 눈물짓게. 

그 가는 실뿌리들에 울려 풀이파리들에도 눈물이 맻히게, 

언젠가 본 산천이 크게 울게. 

그 울음에 휴전선이 동해바다로, 서해바다로 쓸려 들어가 버리게. 

그 마음 이 가슴 깊이에서 울려내주소서. “

어제 『리더스 다이제스트』 11월호가 들어와서 태아가 모태 속에서 바깥소리를 듣고 있고, 어머니의 마음에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느냐는 의학적인 연구 결과를 읽었고, 메이 렘프케(May Lempke)의 「사랑의 기적」이라는 글을 읽고 너무 충격이 컸군요. 사랑이 얼마나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통절히 느끼게 되었소. 사랑은 전능이라고 말해도 될 것 같군요. 모두 그 기사를 읽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군요.

이동철 씨의 『먹물들아 들어라』를 읽고 이 땅의 돼먹지 않은 먹물들의 하나로서 정말 직사하게 욕을 먹었더니 65년 묵은 때가 다 씻겨 내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러나 나의 머리 속에, 생활 습성 속에 스며든 먹물은 그대로 남아 있군요. 여기 있는 다른 청의(靑衣) 동포들에게 느끼던 건널 수 없는 거리감을 또 절실히 느끼게 되는군요. 이동철 씨의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나 같은 먹물에겐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갈 수 없는 것과도 같은 것이 아닐는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내 머리속의 먹물은 어찌할 수 없지만 내 발바닥과 이동철 씨의 발바닥은 별 차이가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그의 발바닥의 기도를 나의 발바닥으로 들어보았더니 이렇더군요. 

“하느님, 내 눈을 후벼 빼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볼 겁니다. 

내 고막을 송곳으로 찔러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들을 겁니다. 

내 코를 틀어막아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숨을 쉴 겁니다. 

내 입에 반창고를 봍여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소리칠 겁니다. 

단칼에 내 목을 날려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꿈을 꿀 겁니다. 

내 손목을 도끼로 찍어내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새끼를 꼴 겁니다. 

창을 들어 내 심장을 찔러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피를 콸콸 쏟으며 사랑할 겁니다.

나를 발바닥채로 들어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불을 질러 보시라구요. 

젠장, 난 발바닥 자국만으로 앉아 길가의 풀포기들을 사랑할 겁니다. “

 

먹물이 밴 머리는 그의 천국에 못 들어가도 발바닥만 들어가면 되는 것이 아니겠소? 한가지 그에게 하고 싶은 말. 먹물들을 신나게 씹어 대다가 그는 상당히 ‘이빨 까는’ 게 재미있어진 게 아닌지 몰라. 어떤 먹물도 이동철 씨만큼 입심 좋게 이빨을 까댈 사람이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예수님은 먹물들을 씹어 대는 말도 가끔 하셨지만, 그보다는 더 많은 말을 직접 발바닥으로 발바닥들에게 했었거든요.

난 지금 성탄을 앞두고 오늘 우리 가운데 오셔야 할 예수에 대한 명상을 많이 하고 있어요. 성탄의 메시지는 “땅엔 평화”라는 한마디였다는 것이 깊이 가슴에 울려오고 있군요. 그러나 그 평화가 무엇이냐는 걸 쓰기 전에 땅과 우리와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더군요. 땅과 가장 관계가 깊은 것이 발바닥이요, 발바닥이 땅과 관계를 가지면서 생기는 것이 길이죠. 그런데 예수는 “내가 길이다”고 하셨거든요. 그 길이 진리, 곧 참 진실이라는 거구요. 그 길이 생명, 곧 평화에 이르는 참 길이라는 거 아니겠소? 그것이 곧 하느님께 이르는 길이기도 하구요. “내가 길이다”고 하셨을 때 그것은 “나를 밟고 가라”는 말이 아니겠소? 그러면 그것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나의 명상 한 토막: 

 

나는 모릅니다. 

나는 왜 당신을 밟고 가야 하는지, 당신의 핏자국을 왜 오늘도 밟고 가야 하는지. 

당신의 체온을 한숨을 눈물을 고독을 절망과 허무를 왜 오늘도 내일도 밟고 가야 하는지. 

여기저기서 당신의 살점이 발에 밟힙니다. 당신의 아픔이 내 발바닥을 사정없이 찌르는군요. 

온몸의 피가 발바닥으로 술술 새어 나갑니다. 

그러자 막혔던 숨통이 터지며 다시 발을 옮겨놓을 수 있습니다. 

다시 이유도 없는 이 길을 갑니다. 그럴밖에 다른 길이 어디 있겠습니까? 

당신이 절망하면서도 절망하지 않고 가신 길을 내가 무언데 안 갈 수 있습니까? 

그런데 간밤 꿈에 당신이 끝난 데 다다라 그만 숨이 콱 막혀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당신이 벌떡 일어서시어 나를 밟고 갔습니다. 아픔이 온몸에 번져갔습니다. 

절망과 희망, 슬픔과 기쁨이 피범벅이 되어 땅에 배어들었습니다. 

그제야 난 모든 것을 알았습니다. 참된 것은 무엇이나 오직 이 길뿐이라는 것을.

 

당신의 작은 발과 나의 큰 발이 뗄 수 없는 짝이 되어 이 길을 걸어오기 38년, 앞으로도 뒤도 안 돌아보고 다정하게 걸어가야지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요새는 내 발자국이 당신의 발자국에 겹쳐지는 느낌이지만요. 지금쯤은 고구려의 옛 강토인 만주 벌판에 나란히 찍혀 있는 당신의 발바닥 자국과 나의 발자국이 눈에 덮여서 옛 선조들의 발자국들과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다고 생각해 보구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발바닥을 손바닥으로 만지면서 손바닥으로 들어 보구려. 우리의 민족 전통을 몸으로 느끼며 오늘을 산다는 것이 그런 거 아니겠소?

 

어머님

 

오늘은 목요일. 죄의 용서를 빌고 온갖 매듭을 풀어 달라고 기도하는 날입니다. 그 기도가 오늘 아침 따라 실망하고 슬픔에 잠겨 있는 하느님을 위로해 드리고 격려해 드리는 기도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형제끼리 아옹다옹 싸우고 쥐어박고 터지는 걸 보면서 실망하고 슬퍼하는 부모 생각이 나서, 싸움을 그치고 손잡고 그 앞에 나가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우리끼리 모든 걸 다 풀었습니다. 그러니 실망하지 마시고 슬퍼하지 마십시오. 다시는 마음 상하게 해드리는 일 없을 겁니다” 하듯이 우리 죄의 고백, 사죄도 그런 것이 아니겠어요? 사람끼리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으면서 모든 고리와 매듭을 풀고 평화를 되찾으며 하느님께 용서를 비는 일이 하느님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드리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께 희망과 용기를 드리는 일이구요.

저는 요새 박열규(朴烈圭) 교수의 『한맥원류(恨脈怨流)』라는 책을 읽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조선 때 정치의 요체는 방한(防恨)과 해한(解恨)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책을 구상할 때뿐만 아니라 언제나 ‘어떤 시책이 국민의 원한을 사고 있지 않은가? 살 것이 아닐까?’라는 데 관심의 초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국민의 사무치는 한(恨)은 화(和)를 깨뜨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신하가 억울하게 탈관 삭직을 당해 귀양 가고 거기서 약사발을 받아 죽었다는 것이 밝혀지면, 본인 혼의 한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 즉각 복직시키는 조처를 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정치의 초점은 평화에 있었던 것입니다. 한 왕조가 5백 년이나 수명을 누렸다면 그건 상당히 긴 건데, 그만큼 유지된 데는 이런 것이 힘이 되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버님

 

한을 미연에 막고 막지 못했으면 즉각 푸는 데 정치적인 관심의 초점을 두었다면, 조선의 정치는 너무 소극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분명히 소극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소극적이라는 것은 근본적이라는 것을 저는 십계명의 뜻을 밝히는 과정에서 알았습니다. 원수끼리 사랑하라는 예수의 적극적인 가르침에 비하면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계명은 분명히 소극적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죽이고는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랑하기 전에 죽이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소극적인 계명이 뿌리가 되어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가르침이 꽃핀 것입니다. 나무를 사랑한다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기 전에 나무를 꺾지 않고 뽑아 버리지 않는다는 소극적인 행위가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무는 꺾지 않고 뽑아 버리지 않으면 잘 자라게 되어 있는 것 아닙니까? 무얼 섣불리 잘해준다는 것이 해를 끼치는 수가 많은 거죠. 그래서 노장(老莊)은 무위를 말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네게 싫은 것은 남도 싫어하니까 그런 일은 하지 말라고 한 공자의 가르침이 선행되어야, 네게 좋은 건 남도 좋아하니까 그런 일은 해주라고 하신 예수의, 소위 황금률이 제대로 사랑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례 요한도, 예수도 “회개하라”는 말로 천국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건 곧 사람들 사이에 맺힌 매듭, 곧 한을 하느님 앞에서 풀라는 거죠. 그래야 평화의 왕국인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문을 거치지 않고는 천국, 곧 평화에 이르는 길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을 막고 한을 푸는 일은 정치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활 영역에서 생의 실마리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원한이 없는 평화로운 사회를 이룩하는 길인가요? 그것은 첫째 ‘평(平)’, 곧 높고 낮음이 없어야 된다는군요. 다음으로 ‘화(和)’, 곧 조화. 크고 작은 것이 없이, 많고 적은 것이 없이 고르면 ‘화’가 생긴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和’는 벼 화(禾)에 입구(口) 군요.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골라야 ‘화’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동기들이 다 같이 가난할 때는 그렇게 사이좋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잘살게 되니까 불화가 오는 것을 우리는 흔히 봅니다. 불화보다는 고루 가난한 게 낫지요. 제일 좋은 건 고루 잘사는 거죠. 서로 사이좋은 즐거운 면이 강조되면 평화가 화평이 되는군요.

자유와 평등, 아니 자유의 평등을 신조로 삼는 민주주의 같은 건 생각할 수도 없는 그 한 옛날에 벌써 동양 사람들은 평화를 이렇게 투철하게 이해했었으니 놀랄 뿐입니다.

 

(11월6일) 접견 끝나고 들어와 운동하고 냉수 목욕하고 계속합니다. 우리 어머니는 너무하셨군요. 10대 소녀 기분 그대로시군요. 그래도 그만하시기 천만다행,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들어와서 생각하니까 연변대학과 하와이대학이 자매결연 맺은 일이 그냥 심상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아버님께 큰 축하를 드립니다. 아버님 평생 하신 모든 일에 맞먹는 역사적인 일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마음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굉장한 일도 말 한마디로 이룩될 수 있다는 놀라운 일을 깨달았습니다. 갑자기 온 세상이 밝아지는 듯 인생이 즐거워졌습니다. 바우의 맑은 눈, 웃음, 목소리가 감방을 환히 빛내 주는군요.

 

바우야, 넌 날 정말 기쁘게 해주는구나. 그리고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해줄 이 나라의 복덩어리구나. 다시 만나는 날 꼭 안아 주마. 약속.

 

아버님

 

너무나 소중한 아버님. 전 어제 恨과 평화의 소극적이면서 근본적인 관계에 관해서 썼습니다. 이제는 그 적극적인 관계를 민족사의 맥락에서 써보고 싶습니다. 우리 근대사의 서장이라고 할 수 있는 동학 농민전쟁 때 일본 총에 맞아 눈을 감지 못하고 죽은 농민들의 한을 풀어주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침략적인 외세를 물리치고 농민들까지 남부럽지 않게 사는 일 아니겠습니까? 현시점에서 그것은 곧 민족통일을 이룩하는 일입니다.

분단되어 있는 한 우리는 외세의 굴레에서 벗어날 길이 없고 우리의 경제가 제대로 풀릴 길도 없기 때문입니다. 3·1운동 때 진주 어떤 지게꾼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지요. 붙잡혀가서 얻어맞으면서 “내 속에는 독립 만세 소리 밖에 없기 때문에, 때릴수록 그 소리밖에 나올 것이 없다”고 했다는 얘기. 이렇게 맞아 죽고 불타 죽은 이 겨레의 한, 아직도 풀리지 않은 한을 푸는 길도 통일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통일만이 이 겨레의 완전 자주독립이거든요. 자유가 없는 독재 통일이 아니라, 자유의 힘으로 자유를 꽃피우고 누리는 자유를 향한 통일, 그것만이 그들의 한을 풀어주는 일이지요. 4·19의 젊은 원혼들의 한을 풀어주는 일도 그것 말고 없습니다. 민주주의의 제도적인 정착이 4·19의 외침이었고, 통일이 그에 뒤따라 일어났던 외침이었거든요. 그 외에도 우리의 근대사는 풀어야 할 많은 한이 맺힌 채 있습니다. 그것들을 푸는 일이 분단의 비극과 저주에서 벗어나는 길이요, 평화에 이르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그 한들을 풀지 않고 우리의 앞길이 어떻게 열리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복을 받겠습니까? 그 한이 아직 우리가 마시는 공기 속에 차 있는데 어떻게 화(和)가 있을 수 있습니까?

 

은숙에게: 

 

(11월 7일) 어제 볼 수 있으리라고 기다렸는데, 연습 때문에 못 와서 섭섭했지. 어제 내가 한 말은 어머니를 통해서 들었겠지만, 모든 것을 요약하면, 욕심을 내지 않아야 무엇이나 제대로 풀린다는 점을 명심하라고. 건강에 대한 욕심을 버리기까지 요가는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게 그동안의 경험이야. 매사가 그렇다고 난 생각해요. 오늘 아침에는 오래 흥얼거리며 기다리던 26장 곡이 마침내 내 속에서 새 가사를 불러내었어. 은숙에게 들려주고 싶군. 5절만 적지. “울려서 주소서. 그 고운 마음을. 이 작은 가슴 아프게 때리면서. 바우와 보라가 손잡고 춤추며, 큰 웃음 터뜨리도록 울리소서” 식구들에게 들려드려요. 이번 아이다 명연주가 아니라 스스로 즐기는 연주가 되기를 빌지. 떠나기 전에 한 번 얼굴이라도 보고 싶지만 Aufwiedersehen! Viel Glück.

 

아버님, 어머님

 

평화에 관한 저의 명상을 계속하겠습니다. 한국인과 동양인의 평화의 근본이 소극적으로, 적극적으로 어떤 것이냐는 것은 위에서 말한 대로인데, 도인들이나 정치사상가들은 어떻게 생각했던가요? 노자의 유명한 말, “천하를 다스리는 건 생선을 굽는 것 같다” 이 말은 너무 손을 많이 대면 고기는 다 떨어지고 뼈만 남는 거야, 그러니 가급적 손을 덜 쓰는 게 좋아, 그런 뜻이지 요. 그의 무위 사상이지요.

공자가 보기에 이건 너무 소극적이었습니다. 노자가 말하는 그런 치자(治者)는 세상에 없으니까요. 무언가 치자는 설쳐 대며 할 텐데, 그걸 덕으로 하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고 공자는 생각했던 것 아니겠습니까? 아버님 앞에서 공·맹자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야말로 공자 앞에서 문자 쓰는 격이지만, 평화에 관한 사상들을 정리해 보려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공자가 보기에 평천하(平天下)는 덕(德)으로 수신(修身)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이었죠.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수신제가(修身齊家)의 길은 덕으로 될지 모르지만,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는 그걸 가지고 안 된다, 거기는 전연 다른 원리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공맹은 수신에서 평천하에 이르는 인간 생활은 모두 한 원리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것이 공자에게서는 세분된 도덕적인 덕목이 되었는데, 맹자에게 와서는 ‘인(仁)’으로 통일이 되지 않습니까? 그리되면 仁은 윤리 도덕 이전이요, 도덕을 넘어서는 심성 같은 거요, 윤리 도덕을 완성하는 힘 같은 것이 되는 것 같습니다. 성서에서 율법을 완성하는 것은 사랑이라고 했을 때 같은 것을 말한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을 인정이다, 어진 마음이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저는 그런 생각입니다. 현대인들은 아마 이런 생각을 너무도 소박한 관념론, 이상주의라고 할 겁니다. 공맹은 나무에 올라가서 고기를 낚으려고 했기 때문에 평천하는커녕 치국도 못 했다는 거죠.

그런 말을 하는 이원론자들의 주장은 그대로 따를 수 있는가? 그건 세계대전을 두 번씩이나 일으킨 서구의 정치철학으로서 공맹은 실패하고 손을 털고 물러앉았지만, 서구의 이원론은 무서운 비극을 인류에게 안겨주었고, 그 비극은 이대로 가면 인류를 총파멸로 이끌어가고 말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서구의 이원론에 철저한 회의를 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仁의 일원론에 눈을 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仁으로 정치와 경제에 굴레를 씌우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비정의 세계에 仁을 누룩처럼 침투시킬 수는 있을 겁니다. 또 그래야 하구요. 그것이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 아니겠습니까? 예수와 유다의 결정적인 차이도 이런 데 있었을 것 같습니다. 공맹의 결정적인 과오는 仁, 곧 인정을 찾을 수 없는 데 가서 찾으려고 했던 데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요가를 하면서 터득한 인도인들의 평화관, 성서의 평화 이해는 다음 편지에나 개진해 보겠습니다. 부디 건강에 유념하십시오. 특히 어머님.

 

1982.11.

아들 올림

 

恨과 평화의 관계에 대한 생각, 민족통일이 민족의 한을 풀어주는 길이라는 생각을 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