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평화, 평화

어머님

 

(전 편지에 이어서) 아버님, 어머님의 관에 첫 흙을 떨어뜨릴 것도 저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 생각만 하면, 저는 무거운 죄책감에 눌리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습니다.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아버님, 어머님 은혜를 갚을 길 없으니 아버님, 어머님을 땅에 묻으면서 어찌 죄인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죄책감에서 저는 벗어났습니다. 아버님을 저희 가운데 보내 주시고 인생을, 믿음을, 그 겸비를 보여주신 하느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그 아버님의 아들로 살아왔다는 것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님, 어머님과 같이 앉아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아버님, 어머님의 일대기를 쓸 수 없다면, 이건 정말 저에게는 한으로 남을 것입니다. 아버님이 정열을 가지고 준비하신 만주의 한인과 기독교의 역사가 완성되는 것, 또 그렇게 뜨겁게 빌며 기다리시던 조국의 통일도 못 보고 가신다면, 그것도 제 마음에는 한으로 맺힐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비스가(산 이름) 산꼭대기에 올라가 약속의 땅을 건너다보기만 하고 요단강을 못 건넌 모세를 생각하고 위로받을 것입니다. 동주의 뼛속, 살속에 응어리져 있던 민족시들이 화장터의 연기로 사라진 일을 생각하며 위로받을 것입니다.

모세의 한은 여호수아가 풀어주었고, 화장터의 연기로 사라진 동주의 시들은 이 땅의 젊은 시 인들에게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아버님의 콩팥을 받은 사람이 우리 가운데 살아남을 것이구요, 아버님의 눈을 받아 광명을 찾은 사람이 아버님의 눈으로 아버님이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시던 통일을 볼 거니까요. 통일이 오는 날 누구의 눈에서보다도 아버님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더 많이 흐를 것입니다. 아버님은 내일모레면 아흔이신데, 큰일을 미완성으로 후대에 남기고 떠나신다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입니까? 방바닥이나 덥히며 노망이나 들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되는 나이인데 말입니다.

김활란 박사가 당신 장례식에 할렐루야를 불러 달라고 유언을 남기셨지요. 우리 아버님을 천국으로 보내 드리는 날도 우리는 할렐루야를 불러야 합니다. 천국 문턱에까지 가셨다가 아버님 병구완을 하려고 어머님은 다시 돌아오신 셈이 되셨군요. 증조모님, 조부모님, 이제 또 아버님까지, 어머님을 위해서 하늘에 마련된 상이 크고 또 크리라고 믿습니다. 병간호에 지치지 않으시도록 어머님도 효소를 잡수세요. 꼭 잡수세요. 어머님 건강을 빕니다.

 

아들 드림

 

아버님

 

성탄에 아기 예수의 몸으로 이 땅에 온 평화의 이야기를, 오직 짓밟히고 부서진 평화로만 경험할 뿐인 지상의 평화 이야기를, 이지러짐이 없는 영원한 평화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서시는 아버님께마저 하렵니다. 성서가 말하는 평화는 모든 좋고 아름다운 것의 이지러짐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평화란 부서진 상태로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신비하게도 평화가 참 평화일 때, 그것이 아무리 박살 나도 그 박살 난 조각 하나하나는 이지러짐이 없는 평화를 보여줍니다. 산산조각이 난 부스러기 하나하나에서 태양이 옹근 채로 보이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성서의 평화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루고, 이 민족의 혈관 속을 흐르는 평화의 기질과 전통 이야기를 좀 더 해야 되겠습니다. 맺힌 한을 푸는 데서 평화가 시작된다는 것이 우리의 민족사 속을 흐르는 평화의 맥이라는 것은 11월 편지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평화의 적극적인 전통은 없는가요? 옛적에 중국 사람들이 이 나라에 와서 우리 선조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군취가무 주야부절(群聚歌舞 晝夜不絶)”이라고 했습니다. 온 부락이 떨쳐 나와 시작한 가무가 밤새 계속되는 걸 보면서 중국인들은 놀랐습니다. 이건 그대로 ‘화락(和樂)’입니다. 우리의 핏속을 흐르는 평화의 전통은 단순히 전쟁이 멎는 상태도, 골고루 나누어 먹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도 아니고 다 같이 얼싸안고 즐거운 것입니다. 이 화락이 깨지는 것은 우리에겐 가슴에 맺히는 한이 되는 것이지요. 이 겨레가 유난히 한을 아파하는 까닭은 이 겨레가 유난히 ‘화(和)’를 즐거워하기 때문입니다. 그 和가 정치적이요 사회적인 데 멎지 않고 가무라는 예술로 승화되었습니다. 그 예술은 귀족화되지 않고 민중의 것이었습니다. 이 전통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살아 내려와 있습니다. 해방 후 그 짧은 기간에 우리는 세계 정상급 음악가를 동양의 어느 나라도 따를 수 없을 만큼 많이 배출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핏줄 속을 면면히 흘러내려 온 가무의 기질이 아니겠습니까? 특히 한국 사람은 합창을 즐기는 민족입니다. 우리의 어린이 합창단들이 세계를 누비는데, 이건 심상히 보아 넘길 일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음악 전문가가 아닙니다. 싫은 걸 억지로 부르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합창이라는 음악은 억지로 부르게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는 화음이 있고 즐거움이 있습니다. 화락이지요. 일본에는 아무리 큰 교회에도 성가대가 없었습니다. 요새는 어떤지 몰라도. 한국에서는 성가대가 없는 교회를 찾아보기 힘들 겁니다. 성가대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 평신도들이 예배 때에 부르는 찬송만도 외국인들의 귀에는 다만 놀라움입니다. 요새 교도소에서 찬송가를 많이 들려주는데, 한국 사람처럼 찬송을 잘 부르는 민족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우리의 평화의 기질과 전통은 和를 다 같이 어울려 즐기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적극적인 평화의 전통을 성서에서 말고 또 어디서 찾을 수 있을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즐기는 和, 즐거운 和는 결코 강요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점이 우리의 和가 일본의 ‘대화(大和)’와 다른 점일 것 같습니다. 한국의 和가 횡적이라면 일본의 和는 종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일본의 和는 위에서 아래로 강요된 和인 거죠. 철저하게 군국주의적인 일본인들은 종의 和로 잘해 나갈 것이지만, 한국 사람들은 그것으로 될 수가 없습니다. 종의 질서는 한국에서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강요되면 이 민족의 얼은 고갈되어 죽고 맙니다. 유교의 종의 질서가 조선 5백 년 동안 얼마나 이 민족을 시들어 말라 버리게 했습니까? 그보다 더 철저한 종의 질서를 강요하는 공산주의도 이 민족에게서 화락의 얼을 깡그리 말살해 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정치적인 동기야 어디 있었든, 정부가 민족 대화합을 내세웠을 때 저는 정말 기뻤습니다. 민족 분열의 비극을 막는 길은 그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육군교도소에 있을 때 민족 대화해를 말했었는데,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단순히 이 민족을 분열의 파멸에서 구하는 구급책에 멎는 것이 아니군요. 그것은 화를 즐기는 평화의 전통이 면면히 흐르는 민족사의 명령이요 완성입니다. 화락이 아니고는 이 민족은 시들어 버립니다. 우리가 창조할 문화는 화락에서 솟아나는 화락의 문화가 있을 뿐입니다. 저는 그동안 무서운 위협을 받는 세계 평화를 위한 누룩이 되는 것이 이 민족의 세계사적인 과제라고 생각하고 기도해 왔습니다. 그 누룩이 무엇이냐고 하면 인정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인정은 기쁨이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저는 낙(樂)을 발견하면서 평화를 위한 이 민족의 세계사적인 사명을 재확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요가를 하면서 터득한 인도의 기질 속에 있는 평화 이야기를 해야 하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요가의 근본은 힘의 균형에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몸의 힘과 마음의 힘의 균형, 거기서 나오는 조화입니다. 그것을 ‘하나 됨’이라고 하는 겁니다. 정신의 우위를 주장해서 요가는 정신 통일이라고 하지만, 그 정신 통일이라는 것이 몸과 마음이 하나 됨으로 얻어지는 상태입니다. 이런 요가의 평화는 몸과 마음의 상극을 해소하는 개인적인 것이었습니다. 석가는 그것을 우주의 차원으로 확대한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불교는 몸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불교의 궁극적인 평화는 몸이 부인된 마음만의 열반이 되어 버렸습니다. 불교가 만일 그 깊은 정신성과 함께 몸의 의미를 잃지 않고 몸과 마음의 균형과 조화를 유지했더라면, 아시아인들은 훨씬 더 행복하게 평화를 누릴 수 있지 않았을까요?

기독교도 헬라 철학의 세례를 받으면서 같은 과오를 저질렀습니다. 불교는 몸을 없는 것으로 치부함으로써 적극적으로 평화에 기여하는 데 실패했지만, 기독교는 몸을 멸시함으로써 마음의 굴레를 벗어 버린 몸의 물리적인 힘이 적극적으로 평화를 파괴하게 하는 과오를 범했습니다. 가공할 핵전쟁, 전자전쟁의 위협 앞에서 속수무책인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 불교와 기독교의 연합된 정신적인 힘이 정말 요청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모든 것을 물리적인 힘 대 정신적인 힘의 대결로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파괴적으로 작용하는 물리적인 힘 뒤에는 욕심으로 발동하는 공격성이 있는 것입니다. 지지난번 편지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죄와 악의 책임은 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 것이거든요. 우리는 오히려 몸의 진실과 바른 긴장 관계, 바른 균형을 유지하면서 조화를 이루는 마음으로 평화를 지켜야 하고 세워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파괴적으로 작용하는 물리적인 힘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냥 평화를 지키고 세워나가는 거죠. 평화에 이르는 길은 평화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저기서 만나는 힘의 불균형을 극복해 가면서 평화를 이룩하는 길은 투쟁이 아니라 평화여야 한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이런 말을 하면 제일 기뻐하실 이가 함석헌 선생이겠지요.

마지막으로 이 모든 평화의 전통에 성서가 더할 평화의 전통은 무엇인가를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성서의 평화의 전통은 위에서도 암시했듯이, 한국의 평화의 전통과 가장 가까운 것 같습니다. 성서에서 평화는 정의와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지난번 편지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인정’이 담기지 않은 정의는 평화를 이룩할 수 없습니다. 평화와 인정이 성서에서는 평화와 정의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평화는 기쁨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평화의 화락을 가장 잘 그려 주는 장면이 이사야 11장이지요.

평화가 예수님에게 와서 새로운 면을 보입니다. 그것이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자기를 억울하게 만드는 사람까지 용서하고 그를 위해서 복을 빌어 주는 마음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그걸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라”는 속담으로 표현하지만, 그건 예수에게서처럼 십자가로 실천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속담이란 일반 서민들의 생활 지혜인데, 원수 사랑이라는 생활 감정이 속담에 씨로 있다는 것은 퍽 중요한 일 아니겠습니까?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은 무저항주의를 넘어서는 적극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성서가 더하는 아주 특이한 평화의 전통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건강’인 것 같습니다.

몸과 마음의 건강이요, 사회의 건강입니다. 성서에서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창조된 대로 완전함을 유지하는 일입니다. 이지러짐이 없는 상태이지요. 건강한 몸과 마음들이 모여서 이룩하는 건강한 사회가 평화로운 사회인 것입니다. 요가는 건강을 중요시했습니다. 그러나 요가는 사회의 건강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성서의 정의는 평등만도 아닌, 또 인정만도 아닌, 그래서 건강한 사회를 이룩하는 적극적인 힘이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정의란 성서에만 있는 것이냐고 하면 그런 것은 아니죠. 그건 그거로서 큰 문제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논급할 수 없군요.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랑도 성서에만 있는 거라고 할 순 없으나, 십자가에서처럼 강하게 실천된 것은 없었던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이 모든 평화의 전통을 수용하면서 이 땅에 평화를 정착시켜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강대국들의 눈치나 보고 있다가는 또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신세가 됩니다. 이건 절대로 피해야 합니다. 우리가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평화를 정착시킨다는 것은 열강을 평화로 인도하는 결과를 빚어낼 수 있습니다. 어림도 없는 소리 하지도 말라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건 우리의 사활이 걸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하는 데까지 하고 나머지는 하느님께 맡길 뿐이죠. 소가 아무리 힘이 세도 코에 코뚜레만 꿰면 아이들도 끌고 다닐 수 있는데, 그 코뚜레는 무엇일까요? 아직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현재로서는 평화만이 우리 모두 사는 길이라는 걸 성심껏 호소하면서 누룩으로 번져 가는 길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버님의 몸과 마음에서 하느님이 영광 받으시기를 아들 익환은 엎드려 빕니다. 아버님을 다시 안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느님!

 

우리 민족의 혈관 속을 흐르는 평화의 기질과 전통 이야기, 요가를 하면서 터득한 인도의 기질 속에 있는 평화 이야기, 평화의 전통에 성서가 더할 평화의 전통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