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대학원 제4학기

어머님께

 

저는 어머님 격려를 받으면서 또다시 들어온 셈입니다. “목사님, 다시 들어가지 마세요” 하는 어떤 젊은이의 말을 듣고 “나도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아” 했더니 어머님이 옆에서 들으시다가 “그게 무슨 소리야?” 하시잖았어요? 그래서 저는 아무 마음에 걸리는 것 없이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들어온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썩 잘된일인 거구요. 이렇게 하느님의 뜻은 이루어져 가는 것이고 역사는 진전되어 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감사할밖에요.

78년 두 번째로 들어올 때의 감격에 비하면 이번에는 훨씬 차분한 기분이었습니다. 그때 왜 그리도 기뻤던지는 석방된 후 『월간 중앙』에서 옥중기를 써달라고 해서 쓰다가(삭제되고 말았지만) 비로소 알았습니다. 이곳이 바로 내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곳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것은 북간도 명동으로 돌아간다면 그때에나 느낄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것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아주아주 익숙해 있어서 무슨 새로움 같은 것이 없었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퍽 담담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첫날 밤 자리에 누워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니, 여기는 이 땅의 가장 가슴 뜨거운 사람들이 있는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정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어쩌면 지금까지 나는 회오리바람의 변두리에서 떠돌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바로 회오리바람의 눈 한복판에 들어왔다는 느낌입니다. 섭섭한 건 이렇게 병사(病舍)에 격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아 참, 오늘 접견 나가다가 김정남 씨가 운동하고 들어가는 걸 만났습니다. 또 하나 민족사의 상층부에서 활동하다가 민족사의 새살이 나와야 밑바닥으로 내려왔다는 걸 깨달은 것입니다. 여기야말로 이 민족의 모든 부조리가 모이고 쌓이고 비벼대며 아우성치는 곳 아닙니까? 세상은 이 사회의 치부라고도 하구요. 가장 썩어 있는 곳이라고도 하구요. 그러나 새살은 바로 이 밑바닥에서 솟아나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하느님은 또다시 저를 처넣으셨습니다. 저는 그 좀 퀴퀴한 냄새를 맡으며 또 얼마를 여기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아픔의 현장, 문제의 현장에 와 있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하느님은 저를 쓰려고 이렇게 또다시 민족사의 대학원 제4학기에 보내 주신 겁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생각하겠습니다. 이 퀴퀴한 냄새를 24시간 마셔 가면서 민족의 온갖 문제를 가다 오다 만나는 얼굴 얼굴에서 확인하면서. 

어머니, 부디 건강하셔야 합니다. 콩우유를 많이많이 마시세요. 아버님이 가셨을 때만 해도 어머님이 계시니까 하는 생각이 저를 떠받들어 주었습니다. 어머님, 정신력으로 버티어 주시기를 빕니다. 나가는 길로 만사 제쳐놓고 아버님, 어머님 회고록을 마치기로 맹세합니다.

배식이 떴습니다. 저녁을 맛있게 맛있게 먹겠습니다. 보리쌀 한 톨 한 톨 미음이 되도록 씹어 먹으면 그처럼 맛있는 것이 세상에 없다고 느껴집니다. 고단하신데 자주 오지 마세요.

1986. 6. 9. 아들 익환 드림

 

재입소의 심정을 담고 있고, 어머니의 건강을 걱정하고 있다.

네 번째 감옥을 제 4학기로 표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