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눈감고 기다려라

어머님께 

 

어제오늘 날이 흐리군요. 날이 흐리면 몸이 더 가렵지 않으실까 마음이 송구스럽습니다. 오늘 아침 비닐 창밖으로 주르륵하는 빗소리를 들으며 두 손 모아 합장하고 구름 저편으로 영락없이 솟고 있을 해를 기다리노라니, 아버님의 목소리가 은은히 들려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들아, 눈 감고 기다려라. 비닐 창밖으로 주르륵주르륵 빗소리 나며 죽은 하늘 희부연 아침이면 두 손 모아 합장하고 서서 눈 감고 기다려라. 청진 원산 속초 울진 앞바다에 피를 쏟으며 모래 불을 어루만지는 나의 마음, 네 가슴에 화끈 솟아나리라. 높은 산 깊은 골 핏자국을 찍으며 더듬어 오르다가 설악산 등성이에 쭉 뻗어 버린 너의 기다림 눈시울을 적시나니, 두만강 가를 서성이는 문석의 가슴을 터뜨리며 불끈 솟아나리라. 아들아, 온 세상이 이리도 구중중한 아침이면 네 염통 쿵쿵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눈 감고 기다려라.”

이렇게 저는 아버님과 마음이 통하고 말을 주고받습니다. 아버님이 세상에 살아 계실 때보다 어쩌면 더 가까이 모시고 지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앙의 관계란 이렇게 죽음의 구렁을 훨훨 넘어 오가며 마주 울리며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저께 아침에는 활짝 웃는 해를 맞았습니다. 안도현이라는 어린 시인의 「귀(歸)」라는 시를 읽다가는 호되게 야단을 맞았었는데, 그저께 아침에는 같은 시인의 「가자」라는 시를 읽는데 “저것 봐. 악쓰며 뜨는 우리 해 맑다”라는 마지막 구절에 이르러 ‘허 허 허’ 웃는 해의 웃음소리가 나서 쳐다 보았더니, ‘젊은이가 그만하면 나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것 같군’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무슨 거짓말을 그렇게 시치미 딱 떼고 하지? 해가 무슨 말을 한단 말이야?’ 물론 그건 나의 마음의 경험입니다. 마음의 눈이 보고 마음의 귀가 듣고 마음의 입이 말을 하는 겁니다. 이것도 제가 입으로 밥을 씹어 먹는 것만큼이나 틀림없는, 아니 그보다 더 절실한 현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감옥 생활이 하나도 따분하지 않습니다.

같은 시인의 「산맥의 노래」를 읽으면서 이 시인은 석가모니가 평생 걸려서 힘들게 도달한 경지에 이미 다다랐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명상의 길을 통해서 색안경을 벗고 살아 꿈틀거리는 세계를 보는 것보다는, 분단의 아픔이라는 민족의 슬픔 앞에서 무너지면서 태백산 줄기를 쳐다보다가 저도 모르게 그 색안경이 벗겨지는 공(空)의 세계에 그리도 쉽게 들어설 수 있는 것 같군요. 

“마음이 가난한 사람”, “마음이 맑은 사람”이 바로 필생의 명상으로 석가여래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과 얼마나 다를 것인지? 어떤 면에서 같고 어떤 면에서 다른 것인지? 이것이 요새 저의 관심입니다. 내일 계속해서 쓰겠습니다.

 

 

1986. 6. 16.

 아들 드림 

 

어지나, 시원아

 

시원스레 어지나야, 어질게 어질게 시원스런 우리 귀염둥이 남매야. 코 막히게 답답한 세상에 가을 하늘처럼 시원하게 어질거라. 눈 감으면 코 베어갈 각박한 세상에 너희 눈빛처럼 어질게 시원하거라. 시원하고 어진 세상 너희 가슴으로 열어라.

 

1986. 6. 16. 

할아버지

 

빗소리를 들으며 아버지와 마음이 통하는 느낌과 안도현의 시에서 느낀 감정을 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