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의 하느님

당신께

 

우선 시편에서 꼭 고쳐야 할 것들, 아니 바로잡을 것들을 일차로 적어보기로 하겠소.

 

5:8 – ‘이 몸에서 죄를 벗겨 주시고’ → ‘당신의 올바른 길 따라 걷게 하시고’

7:4 – ‘이 손들이 … 받기나 했다면’에서 시작됨

9:5 – ‘꺽으시고’ →’호통치시고’

13:4 – 원수들은 나를 꺾었다며 뽐낼 것입니다. 

적들은 내가 쓰러진 걸 보고 기뻐 뛰게 될 겁니다.

14:3 – 두 번째 ‘착한 일 하는 사람 하나 없구나’ →’정말 하나 없구나’

16.4 – ‘망측합니다’ 삭제

 

매일 조금씩

 

오늘 아침에 뵌 어머님은 퍽 기운이 없어 보여서 마음이 안 좋군요. 지금 막 6일 편지가 전달되어 읽었소. 빨간 장미에 향숙의 기다림…… 민족의 아픔이지요. 봉투에 편지를 다시 넣으려고 보니까 바우의 동시와 그림이 있었군요. 바우야, 「우리 엄마」라는 동시가 정말 좋다. 빈말이 아니다. 감상이라는 어른스러운 말도 그리 부자연스럽지 않고, 생시와 꿈이 엄마의 손길과 노래로 밝아 오는 네 마음이 눈에 잡힐 듯 삼삼하구나. 할아버지 꿈꾸는 시 한 편 써보면 어떨까? 맨 처음 ‘우리 집’의 ‘우리’는 없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제목이 「우리 엄마」고 그 말이 다음 다음 줄에 또 나오니까. 그냥 ‘집 구석구석을’ 하면 네 엄마의 노래가 우리 집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집을 골고루 음악으로 채워 준다는 것도 느끼게 해주거든. ‘항상’이라는 말보다는 ‘늘’, ‘언제나’라는 우리말을 쓰는 게 좋지 않을까?

요새 남아프리카에서 인종차별과 싸우는 투투 주교의 글을 읽는데, 저번에 접견장에서 잠깐 이야기했지만, 독일의 구속사 신학과 남미의 해방 신학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군요. 미국의 검은 신학과 맥이 닿아 있으면서도 아프리카만이 가지는 검은 신학이 어떤 것이어야 하느냐는 것이 잘 잡히지 않아 좀 유감이군요. 구속사 신학이 창조 신학과 일체가 되어서 자연의 의미가 담기지 않으면, 그 구속사는 추상이 되어 버리지요. 독일의 구속사는 먹고 입을 걱정이 없는 사람들의 신학이거든요. 하느님의 구속사의 대상인 사람을 일단 자연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지요. 자연은 곧 하느님의 창조인 거고, 하느님의 창조, 곧 자연의 절정이요, 의미인 인간이 하느님의 구속의 대상이 되는 것이거든요. 사람이란 역사적인 존재이기 전에 자연이거든요. 자연이 인간에 이르러 역사적인 차원에 올라서기는 하지만, 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은 사람은 자연에 멎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주체가 되는 데 있는 것이긴 해도, 자연에서 역사로 국적을 옮기는 것은 아니거든요. 사람이란 자연과 역사가 만나는 교차점이라는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역사적인 인간이 된다는 것도 결코 자연의 의미를 버린다는 것이어서는 안 되지요.

자연의 의미를 충분히 음미하는 입장에 섰더라면 그는 아프리카의 종교성을 그렇게도 철저하게 외면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결코 자연 종교를 배격한 게 아닌데, 투투 신부는 야훼 종교와 바알 종교를 구속사 신앙과 자연 종교의 단계라고 잘못 보고 있군요. 북방 이스라엘의 신은 바알이 아니라 엘 샤따이, 곧 농경민들의 신이었거든요. 바알도 자연 종교의 신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이 자연 종교의 신이었기 때문에 배격된 것이 아니라, 농촌을 억압 착취하는 도시 국가들의 종교의 신이었기 때문인 건데, 이것이 지금까지 전혀 제대로 이해되고 있지 않은 거죠.

그 점에 있어서 창세기 2장은 아주 중요한 거요. 폰 라드라는 독일의 구약 신학자는 창세기 2 장은 구속사의 서장에 불과하다고 보는데, 그것은 창세기 2장의 창조 기사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나의 주장이었소. (문희석 편 『모세 오경 연구』에 있는 「구속사와 창조사」라는 나의 논문을 읽어 보시오) 창조는 구속사의 서장이 아니라, 그 의미요 내용인 것이오. 예수님의 하늘나라의 의미가 ‘일용할 양식’이라는 것과 같은 이야기죠. 출애굽에서 시작되는 구속사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는 역사였거든요. 땅이 중요한 거죠. 아프리카인들은 흔히 맨발로 돌아다닐 텐데, 그 한 발자국 자국에서 발바닥으로 땅에서 하느님을 ─ 신이라고 해야겠군요 ─ 신을 경험할 수 있는 게 땅인데, 그리고 그 땅은 신의 선물이요, 축복이요, 신의 임재로서 온통 거룩한 것인데, 사람의 몸이 온통 자연이요, 우리는 온몸으로 신을 경험하는 건데, 몸으로 신을 경험한다는 건 자연이 곧 신의 성소라는 건데, 이런 신앙으로 아프리카는 온통 젖어 있을 건데, 투투 주교는 그 의미를 외면해 버렸더군요.

예수가 계시하는 건 그 자연 종교로 나타난 인간의 느낌이나 몸부림에 숨겨져 있는 참뜻을 밝혀 주는 것이라고 봐야 하는 건데, 우리가 예수에게서 받은 것은 벌이라고 믿는 것은 옳은 일이요, 좋은 일이지요. 그러나 빛은 어디까지나 주위에 있는 걸 바로 보게 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겠소? 예수의 빛으로 우리는 우리 것의 참뜻을 깨쳐야 하고, 투투 주교는 아프리카의 종교에 내포된 것을 바로 이해하고 그 참뜻을 밝히 보아야 하는 건데.

우리 아버지의 세대가 우리가 가지고 있던 전통적인 것은 실패라고 보고 기독교만을 너무 좁게 배타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처럼, 투투 주교도 그런 과오에 빠져 있는지도 모르죠. 아프리카의 실패, 비극의 책임을 그들의 전통 종교에 지우는 것이 아닐는지. 그 책임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죠. 반면 아프리카 비극의 더 큰 책임이 투투 주교가 믿는 기독교에 있는 것 아니겠소? 오늘은 이만.

 

1986. 10. 10. 당신의 늦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투투주교의 글을 읽고 아프리카만의 검은 신학이 없음을 아쉬어하며 느낀 점을 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