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슴에 안겨 우는 기완이 누님

닉환이 형님이 기완이 아우에게

 

기완이를 아우라고 부를 용기를 준 건 기완이가 늘 나를 형님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기완이 누님이 나를 정말 큰오빠처럼 가슴에 온몸 허물어져 왔기 때문이었소. 온몸 허물어져 가슴에 안겨 우는 기완의 누님! 그건 영락없이 내 동생이었소. 그때처럼 기완이와 같이 평양에 오지 못한 걸 아쉽게 생각한 때가 없었다오.

기완이! 누님은 기완이보다 더 젊어 보이더군. 단단하고, 손은 일을 많이 한 손이었고. 지금은 연금을 받아 산다고 했는데, 남편과 같이 그날도 어디 가서 무슨 일을 하다가 당에서 부르기에 가봤더니, 나를 만나러 평양으로 가라고 하더라는 것이었소. 남편이 무얼 하는 사람인지 못 물어봤구먼. 아이가 낳는 대로 죽었는데, 마지막으로 낳은 아들이 죽지 않고 살아서 지금 같이 산다더군. 지금 나이가 열여섯 살이라니까 마흔다섯쯤에 낳은 셈이지요. 어머님이 세상 떠나신 게 언제라고 듣기는 했는데, 녹음 테이프 하나 만들어 가지고 왔는데, 그걸 못 가지고 들어왔구먼. 거기는 그게 있을 텐데. 그걸 믿고 적어 두지 않았거든. 누님은 신문에 나는 동생의 기사를 모두 오려 가지고 있다고 하더군.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당에 말했던가 보지. 나더러 만나겠느냐고 해서 만나고말고 했더니 오게 했던 거였소.

마침 원담이 출판한 『꿈을 비는 마음』 한 권이 있어서 주면서 이건 기완의 큰딸이 낸 나의 시 집이라고 했죠. 또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를 주면서 발문을 기완이가 쓴 거라고 했더니 기뻐하더군. 마침 내가 가지고 간 사진들 가운데 계 선생과 나와 셋이서 찍은 것이 있어서 그걸 주었지요. 아마 잘 때도 가슴에 품고 잘 거로구먼.

다음 8·15에 북쪽에서 보내 주었으면 좋을 텐데. 어쩌면 그런 생각을 할지 모르지. 아니, 그럴 게 아니라 「한겨레 신문」에 누나에게 보내는 편지를 기고하라구. 저쪽에 분명히 전해질 거라고. 거기에 이번 8·15에 서울 오라는 말도 쓰고. 그래서 만나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어제 박(형규) 목사 이야기를 들으니까 요새 내 몫까지 하느라고 목이 다 잠겼다면서? 그만하면 건강이 좋아진 것 아닌가 싶어서 다행이구먼. 비나리 묶음 『해방 통일』 출판을 환영. 아무리 정신없이 바쁘더라도 나한테 한 권 보내야 하지 않아? 말 한마디면 될 텐데. 또 무크도 냈으면 보내 줘야지. 내 시집도 곧 나올 모양인데, 「넋두리 아닌 넋두리」,「45년이라니」 읽었으면 평이라도 써 보내 달라고. 누구의 평보다 기완이 동생 평이 제일 정확하고 무섭다는 걸 잘 아니까. 건투, 건투, 건투.

 

당신께

 

오늘에야 공소장이 전달되었군요. “문익환 등 밀입북 사건” 이렇게 되어 있구요. 유원호 씨가 주범이고 내가 종범이고, 이건 희극인데. 정경모 씨가 북쪽 공작원인 걸 아무 증명 없이 전제하고 “반국가 단체에 이익이 된다는 점을 알면서 그 지령을 받은 자와 통신하여 연락하고” 이런 식이에요. 그가 북쪽 공작원이었다면, 호박 쓰고 돼지 굴로 들어온 어리석어도 한참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거죠. 성근이 말로는 왜설물 이외에는 무엇이나 된다는 교정국장의 말인가 본데, 내일까지 기다려 봐야지요. 건강에 관한 집필을 곧 시작하겠는데, 유태우의 고려수지침 책이 빨리 와야겠어요. 이철용 의원에게 말해 보든지, 기독교회관에서 5가로 내려가다가 오른쪽으로 작은 의학 서적 책방이 있는데, 거기 들러 사 오든지.

강종건의 부인 이문희는 남민전 사건에 걸렸던 사람인가요? 유시춘의 뜨거운 편지, 손이 델 것 같군요. 내가 통일을 못 볼지 모르지만이라고 썼더군요. 내가 왜 통일을 못 봐? 물론 1995년까지 산다는 보장은 없지만. 분단 50년을 넘긴다면 우리 다 죽어야지. 전경선 목사 딸의 편지도 감격스러웠구요. 통일 그림 앞에서 찍은 사진 정말 좋구만요. 내가 얼굴이 좀 길다 뿐, 너무너무 닮은 것 같아, 우리 둘은. 

 

사랑, 1989. 6. 9.

 

백기완의 누이를 평양가서 만난 얘기와 공소장을 받았다는 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