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께
어디 가 묵어 있다가 167신, 168신이 오늘에야 배달되었군요. 그 속에서 튀어나온 문숙이 일등하는 사진을 보면서 붓을 들고 싶어졌군요. 태백산맥을 읽으면서 맥이 풀려 오늘은 그냥 넘기려고 했는데. 문숙이는 문씨가 아니고 박씨이기는 하지만, 문씨 혈통도 있는데, 문씨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 가운데서 육상 선수라도 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하니까 괜히 가슴이 설레네요.
이번 (정)명훈, (정)명화 음악회에 가서 그 훌륭한 음악을 들을 수 없어서 유감 천만. 세계에서도 제일 콧대가 높고 문화적인 우월감을 가진 프랑스의 대 가극단 음악감독으로 취임한 명훈이는 우리의 자랑이 아닐 수 없지요.
심전도 측정 결과 조수의 눈에는 완벽하게 보였는데, 내과 전문 의사의 눈에는 흠이 있다는 게 드러났군요. 관상동맥을 거쳐서 심장으로 흘러 들어가는 피가 부족하다는군요. 그리되면 협심증이 오는데, 협심증은 가슴이 옥죄어드는 경우도 있지만, 가끔 콕 찌르는 아픔이 오는 경우도 있대요. 내 경우는 콕 찌르는 아픔이 오는 경우이군요. 나는 그게 신경 작용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군요. 그래서 약을 먹기로 했지요. 그런 증세가 있은 지 한두 달가량 됐어요. 초기 발견이니까 약을 먹으면 별일 없으리라고 확신해요.
편지를 쓰는데 판결문이 왔구만요. 천천히 읽어 봐야지요. 사랑
우혜에게
홍범도, 재밌게 읽고 있어. 홍범도 장군이 홍경래의 집안이라는 사실은 몰랐군. 건투를 빈다.
난 요세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읽고 있는데, 머리를 들 수 없는 수치감에 빠져 있어. 48년 제주도 4.3에 이어 여수 순천에서 일어난 그 처참한 비극은 아랑곳없이 미국 유학 갈 꿈밖에 없었던 나 자신, 그냥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 작법에 대해서 우혜에게 몇 마디 하고 싶어졌어. 이 소설에도 논설조, 혹은 강의조가 꽤 많이 있는데, 이건 작가가 독자를 학생으로 내려다보고 하는 교수의 강의에서 나타나는 고자세의 표현이라는 느낌이 들어. 소설에서는 이런 대목도 관념적인 언어가 아니라 사건적인 언어를 쓰는 게 옳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 또 하나, 독자가 생각하고 음미할 수 있는 여백을 남긴다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지나친 친절은 독자를 얕잡아 보는 게 되거든. 셋째로 지적하고 싶은 건, 대화 형식을 많이 써서 서로 깨우치고 깨우침을 받는, 주고받는 형식이 돼야 한다는 것, 특히 민중의 경험에서 솟아나는 슬기가 전문 지식인들의 사고에 충격을 주고 새 지평을 열어주는 그런 방식으로 쓰여야 할 게 아니냐는 점. 우혜도 읽었을 테니까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견을 듣고 싶군.
늦봄
유원규 목사님
내가 없는 동안 여러 가지로 마음을 써주시지만, 특히 갈릴리교회를 책임져 주셔서 뭐라고 고마운 말씀 다 드릴 수가 없군요. 내가 무능해서 교회를 클 수 없는 작은 교회의 생리로 만들어서 후임들이 고전하는 것 같아 마음이 그리 유쾌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큰 교회는 많으니까 작은 교회만이 해낼 수 있는 일들을 잘 해내는 게 하느님의 섭리가 아닐까 하는 변명 같은 생각을 해 보지요.
저는 요새 정치와 경제에 윤리와 도덕을 활력소로 끌어들이는 문제를 많이 생각해 왔습니다. 유물론자인 고르바초프에게서 목사인 문익환이 큰 깨우침을 받았대서 부끄러워할 일이 아닌 줄 압니다. 생각해 보면 그동안의 끈질긴 인권운동, 민주화·통일 운동을 해온 힘이 도덕력이었다는 분명한 사실을 우리는 자각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해방 후의 계속되는 독재 세력들과 매판 자본들의 횡포와 억압과 착취는 도덕과 윤리의 완전 부정인 동시에 도덕과 윤리의 강한 요청이라는 면도 보여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썩어 빠진 정치와 경제의 기사회생은 도덕적인 부활밖에 있을 데가 없다는 걸 이 땅의 양심은 큰 목소리로 외쳐야 하지 않을까요? 1982년에 출소할 때 저는 해방신학을 가지고 나감과 동시에 정치도의와 경제윤리의 재건에 종교계가 책임지고 나서도록 해야 한다는 사명감도 가지고 나갔었습니다.
그런데 이 호소에 대한 종교 지도자들의 반응은 극히 소극적이었습니다. 정치에 도의를 말하라니, 경제에 윤리를 말하라니, 문 목사 징역을 오래 살더니 정신이 돈 게 아니냐는 듯한 반응이었습니다. 번지수를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아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이 문제에 침묵을 지키고 있을 수 없습니다. 공업용 쇠기름을 식용으로 만들어 파는 실업인들, 오존층 파괴 등 자연환경의 파괴 문제도 다 도덕력의 상실에서 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인류의 생사는 이제 도덕력의 회생 여부에 달렸다는 게 의심할 여지없이 드러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는 교회는 이미 하느님의 교회가 아니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건투를 빕니다.
문익환 1989.11.09
아내에게는 심전도 측정 결과 이상이 발견되어 약을 먹는다는 소식.
송우혜에게는 태백산백을 읽고 느낀 소설 작법에 대한 조언
유원규목사에게는 정치와 경제의 윤리 도덕문제에 대한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