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와 도덕은 생명 사랑이라는 한 뿌리에서 돋은 두 줄기

해바라기님

 

오늘 아침 성경을 읽다가 솔로몬의 재판 이야기에서 슬기와 도덕의 문제에 중요한 해명을 얻을 수 있어서 오늘 하루도 공밥을 먹은 것은 아니라는 느낌이 드네요. 저번에 김승훈 신부에게 띄운 편지에 소리(小利)를 탐하는 슬기는 죄고, 대리(大利)를 탐하는 슬기는 도덕적으로 선이 된다는 걸 썼는데, 오늘 솔로몬의 이야기에서는 생명을 사랑할 때라야 슬기가 정의가 된다는 걸 깨달았군요. 小利니, 大利니 하는 이(利)의 내용이 밝혀진 거지요. 그 利가 생명에 유리하냐 불리 하냐는 것으로 판가름이 난다는 말이군요. 아무리 大利라고 해도 그 내용이 생명을 건지고 생명을 사랑해서 소중하게 가꾸는 일이 아니면 안 된다는 말이겠지요.

이 편지를 읽는 길로 김 신부님 어머님께 문안 전화를 올리고 슬기와 도덕의 문제에 대한 오늘 나의 깨침을 설명해 드리세요. 선악의 판단을 기준으로 한 도덕과 이해득실을 따지는 지혜의 관계를 심각하게 생각하게 한 것은 전두환, 이순자라는 미숙하고 우둔한 인간들이었거든요. 어머님이 입버릇처럼 “저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 저런 바보들을 낳아 놓고도 그 어머니들은 미역국을 먹었을 것 아니냐?”고 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악한 사람은 마음을 고쳐먹으면 되는데 어리석고 미숙한 사람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거든요. 어리석고 악한 사람은 물론 더 소망이 없고요.

여기까지 썼는데 접견이라고 해서 나갔더니 반가운 이들을 만나서 얼마나 기뻤던지. 말이 통하는 사람끼리 이야기를 나눈다는 게 그렇게 즐거울 수가. 생명 사랑이라도 핏줄 사랑은 곤란하다는 이효재 교수의 지적은 정말 되새겨 볼 만한 이야기라고 해야겠군요. 핏줄 사랑은 小利에 속하는 어리석음이요, 도덕을 거스르는 일이죠.

이상의 이야기를 정리해 보면, 지혜와 도덕은 생명 사랑이라는 한 뿌리에서 돋은 두 줄기라고 해도 되겠지요? 무엇이 선이냐는 도덕적인 물음의 정답은 생명 사랑이 선이라는 것이고, 지혜의 물음은 어떻게 하는 것이 생명을 사랑하느냐는 것이죠. 생명 사랑이라는 도덕적인 선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이 지혜라고 해도 되겠지요. 

어제 곽 박사에게 쓴 편지가 아무래도 미진해서 좀 더 쓰기로 하지요.

 

당신의 갈테야

 

곽노순 박사께

 

어제 나는 하느님의 섭리와 역사의 섭리가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는 걸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는 걸 썼는데, 이 두 섭리의 일치보다는 더 근원적인 섭리는 하느님의 섭리와 자연의 섭리의 일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붓을 들었습니다. 사실 역사의 섭리라고 하면 역사의 법칙성을 거부하는 과학적인 말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러나 자연 과학에서마저 불확실성을 이야기하게 되었으니까 역사에서 불확실성을 의미하는 섭리라는 말을 쓴다고 해서 비과학적이라고 접어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불확실성, 곧 우연성이 우리에게 결단의 공간을 제공하죠. 우연성과 우리의 결단으로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 같은데, 지나고 보면 거기 프러스 알파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되죠. 사도 바울이 “내가 오늘의 다 된 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은혜 덕분이다”고 고백하는데, 그것이 바로 프러스 알파의 고백 아니겠어요? 그것을 신안인으로서 역사를 보는 안목에서 신의 섭리인 동시에 역사의 섭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나는 전 세계적으로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서 눈을 뜨고 용트림하는 걸 보면서, 이 둘을 하나로 보는 일이 가능해졌다는 걸 말하고 싶은 겁니다.

다음으로 자연의 섭리의 문제인데, 이건 내가 곽 박사에게서 많은 걸 배워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자연과학에 남다른 조예가 있으면서 원시 종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게 내가 보기에 심상한 일이 아니라고 여겨지거든요. 나는 원시 종교를 부정해 버리고마는 신학은 독단에 빠져있다고 믿습니다. 물활론, 다신교, 범신론 등은 그냥 부정해 버리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것들을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축이 될 수 있는 것을 『사건』이라고 보는데 별 이의가 없지만, 그보다 더 근원적인 뿌리는 생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구속사의 신학과 동시에 창조의 신학이 기독교 신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야 하죠. 이 둘은 결코 분리되는 것이 아니구요. 창조의 신학도 관심의 초점에 창조를 두는 게 아니라, 物(몬)과 생명에 관심을 맞추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物과 생명 속에 내재하는 신은 성서에서는 거부되어 있지요. 그래가지고는 유물론이나 과학과는 만날 수 없는 것이 아닐까요? 이 점 나는 곽 박사에게 기대하는 바가 큽니다. 이만 총총. 

 

 

아내에게는 슬기와 도덕에 관한 깨달음에 대하여, 곽노순 박사에게는 하느님의 섭리와 자연의 섭리에 대하여 생각을 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