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힘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신 하느님

해바라기님

 

장준하의 이름으로 사상계사가 낸 마지막 책이 그가 간 다음 해 1976년 2월 25일 자로 출판된 『릴케의 기도 시선』이군요. 제4일 문고 3호로서. 내가 릴케의 시를 번역하게 된 동기는 성서의 시를 경전이라는 굴레를 벗어 버리고 번역하는 요령을 터득하려는 것이었지요. 그 책이 한 권이라도 집에 남아 있어서 다시 대면하게 되니 감개가 깊군요.

나의 둘째 시집에 「릴케의 하느님」이라는 시 있지요? 그 시는 나의『릴케의 기도 시선』의 둘째 시에서 얻은 착상이었어요. 릴케의 시는 이렇게 시작되지요. 

 

하느님, 옆방에 있는 이 친구 양반, 

난 당신을 긴긴밤 이따금씩 깨우곤 합니다. 

 

다음 시들을 읽어 내려가다가 이런 시에 부딪혀 깜짝 놀라고 말았군요.

 

내 눈을 도려내세요. 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어요.

내 귀를 틀어막아 보세요. 그래도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발이 없어도 나는 당신께 갈 수 있어요.

입이 없어도 나는 당신을 불러낼 수 있어요.

내 팔을 부러뜨리세요. 그러면

나는 당신을 염통으로 잡을 거예요.

내 염통을 멈추게 하세요. 그러면

내 머리통이 뛸 거예요.

내 머리통을 불태워 버리세요. 그러면

나는 당신을 내 핏줄에 띄워 모실 거예요.

 

이 시를 읽고 내가 왜 놀랐는지 아세요? 「난 발바닥으로 살 거야」라는 나의 시의 원형을 여기서 찾았기 때문이에요. 이 릴케의 시가 나의 기억 깊은 데 숨어 있었군요. 나의 시는 발바닥으로 상징되는 민중성이 주제이고, 릴케 시의 주제는 하느님이고요. “입이 없어도 나는 당신을 불러낼 수 있어요”가 나의 시에서는 “발바닥으로 불러낼 수 있어요”가 되죠.

오늘 영금이 피곤이 없는 신선한 얼굴이어서 내 마음도 그만큼 가벼워졌어요. 영금의 옆에서 당신은 좀 피곤해 보이더군요. 그야말로 1인 10역인 데다가 거의 날마다 내 편지 심부름까지 해야 하니. 오늘은 황인철 변호사님께 병문안 편지를 써야겠군요. 또 수고해 주시오.

 

갈테야.

 

황인철 변호사님께

 

직장 수술 받으신다는 소식을 들은 지 한참이 되었는데, 아직 문안 편지 한 장 못 드렸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수술 받으신 후의 경과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저는 그동안 노부모님께 걱정을 안 끼쳐드리려는 일념으로 건강 문제와 씨름하다가 너무너무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우리의 몸속에 생명으로, 생명의 힘으로 들어와 계시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걸 저는 깨달았습니다. 그 믿음이 엄청난 힘이 되지요. 예수님이 병을 고치실 때마다 거의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고 하시죠. 그때의 믿음은 우리 속에 들어와 있는 하느님의 생명의 힘을 믿는 믿음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이번 병석에서 그런 하느님의 힘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을 말씀으로, 마음으로, 사랑으로, 뜻으로 경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생명으로, 생명의 힘으로 경험하는 일이 어쩌면 더 원초적인 경험이 아닐까 싶습니다. 

황 변호사님, 빨리 건강해지십시요. 저도 빨리 건강해질 겁니다. 건강한 몸으로 다시 만나 주의 뜻을 위해서 열심으로 삽시다. 변호사님을 마지막으로 뵌 이후로 세상은 형편없이 달라졌습니다. 독일의 통일이 눈앞에 다가선 현실이 되었군요. 우리의 통일의 해로 설정한 1995년도 결코 꿈같은 이야기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봄바람은 남에서 불어 올라가는 법인데, 어쩐지 올해의 봄바람은 북에서 불어 내려올 것만 같은 예감이 듭니다. 서로 위해서 기도하십시다.

 

이젠 저의 새 이름 갈테야 올림

 

 

아내에게 자신의 시 가운데 릴케의 기도 시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 있다는 얘기를, 수술 후 회복 중인 황인철 변호사에게 쾌유를 비는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