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0227 애정이 담기지 않은 비판은 비방이다

당신께





수경의 어머니, 딸 덕에 상당히 고양된 정신 상태에 이르렀나 보군요. 내가 아는 어떤 청년은 시골집으로 간다는 걸 알릴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할머니가 손자가 올 걸 알고 버스 정류소에 나와 기다리기 때문이라는 거였죠. 지금 수경의 어머니는 딸의 일로 마음이 순수해져 있는 거죠. 마음이 순수하다는 건 맑아졌다는 건데, 그건 딸이 이루려던 일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정신 통일 상태에 도달한 거죠. 마음은 하나에 집중될 때, 하나만으로 차고 넘칠 때 순수하게 되죠.



그 청년의 할머니 마음속에는 손자밖에 없죠. 예수님 말씀에 마음이 맑은 사람은 하느님을 본다고 하셨거든요. 하느님의 마음밖에 생각하는 것이 없는 사람이 마음이 맑은 사람이요, 그런 사람만이 하느님을 보는 거죠.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도 그냥 공이 아니라는 걸 『반야경』에서 空卽是色, 色卽是空이라고 하는 거고. 역시 그 어머니에 그 딸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박원순 변호사님,





『사회와 사상』 3월호에 실린 변호사님의 글 “김영삼 총재님, 어디로 가시나이까?”를 읽고 저는 정말 가슴이 아팠습니다. 김영삼 씨는 자기 선거구민들의 주권을 배신함과 동시에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이 변호사님의 글에서 의심할 나위 없이 드러났습니다. 제가 그 글을 읽고 가슴이 아팠던 것은 그가 자기 자신을 배신한 인격 파산자가 되었다는 걸 발견했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그가 자기에게 표를 던진 선거구민들을 배신했다는 것만이라면, 우리는 격분하고 그를 비판하는 선에 멎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변호사님의 글이 제 가슴을 아프게 했다는 것은 변호사님 자신이 아픈 가슴으로 그 글을 쓰셨다는 걸 말해 주는 것이지요. 그건 변호사님이 깊은 인간적인 애정을 가지고 그 글을 쓰셨다는 말도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문 목사님도 김영삼 씨에게 애정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이 되겠네요.” 이런 변호사님의 질문이 귀에 들려오는군요. 저도 아마 그렇다고 인정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79년 10월도 다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이 안양 교도소에 있었습니다. 10월29일 소내 방송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제 아버님은 그때 캐나다에 계셨는데, 박정희가 죽었다는 꿈을 꾸시다가 전화 소리에 깨어 수화기를 들었더니, 박정희가 죽었다는 소식을 누가 알려주더라는 겁니다. 이 나라의 민주화를 바라는 사람들치고 그 소식을 듣는 순간 만세를 부르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저는 하나도 기쁜 걸 느낄 수 없었습니다. 장례식 실황 중계를 감방에서 서성거리며 듣다가 비로소 내가 왜 기쁘지 않은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나라와 겨레를 대표한다는 대통령의 마지막이 이렇게 처참하고 더럽다니, 이게 어디 기뻐할 일이냐는 걸 저는 통탄스레 느끼고 있었던 겁니다. 첫 대통령도 불명예제대를 해야 했고, 둘째 대통령은 도중하차를 했고, 셋째 대통령은 그렇게도 더럽게 처참한 종말을 고하다니, 이게 무슨 꼴이냐, 이거였지요. 우리는 언제 온 국민이 사랑하고 믿는 대통령, 온 국민의 존경을 받는 대통령을 가져보나, 그 생각을 하다가 “대통령도 국민의 작품이지”하는 걸 깨달았습니다. “너는 이 대통령들의 실패에 책임이 없단 말이냐?”라는 물음 앞에서 저는 머리를 쳐들 수 없었습니다. 대통령의 치욕은 그대로 국민의 치욕이요, 대통령의 비극은 그대로 국민의 비극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깨달음은 저에게 새로운 의무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대통령이 존경할 만한 훌륭한 대통령이 되도록 내가 국민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한다는 자각이 결심으로 굳어졌습니다. 대통령을 비판하는 것은 그를 훌륭한 인물로 만들려는 국민 된 신성한 의무라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애정이 담기지 않은 비판은 비판이 아니라 비방입니다. 애정에서 우러나는 비판만이 비판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전두환 씨에 대한 나의 비판은 결코 애정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내일 쓰도록 하지요.






박원순 변호사의 글을 잡지에서 읽고 박정희의 죽음을 보면서 훌륭한 대통령을 만들기 위해 애정을 가지고 그를 비판하는 것이 국민의 의무라는 생각을 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