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께
지금부터 꼭 14년 전이었군요. 76년 3월 1일이 나의 생의 분수령이 되리라고 어느 누가 짐작이나 했으리오?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세월이었군요. 14년 세월에서 8년 반을 감옥에서 보내고, 5년 반을 밖에서, 그것도 다섯 번에 걸쳐서. 신영복 씨의 20년이나 서승 씨의 19년에 비하면 대단할 것도 없지만. 차분한 서생으로 알려져 있던 문익환이가 던져진 역사의 한복판에서 물러서지도 않고 밀려나지도 않고 한 길로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당신의 정신적인 지원과 격려에 힘입은 바가 절대였다고 해야 하겠지요. 모든 일 속에서 보이지 않게 역사하신 하느님의 섭리의 손길을 안 믿을 수 없군요. 그리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구요.
당신의 늦봄
박원순 변호사님께
여섯 번째 대통령 노태우 씨가 또다시 여섯 번째 실패작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우리 민족의 운명이 기구하다는 느낌마저 들지 않습니까? 이번 재판에서 정부를 비판하는 말을 극도로 피하고 끝까지 이성적인 대화를 하려고 노력했던 것도 여섯 번째 대통령 실패작을 어떻게든 역사에 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한국 국민들도, 운동권도, 노 대통령에게 일 년 유예를 주었습니다. 우리는 일 년 동안 전두환, 이순자의 구속 처벌만을 외쳐 왔습니다. 그러다가 90년에 들어서면서 노 정권 퇴진을 외치게 되었습니다.
78년 12월 31일 첫 석방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중앙정보부의 꽤 요직에 있는 사람이 저의 집을 찾아왔더군요. 한다는 말이 “이제 정부와 대화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좋지요. 지금까지 한 모든 말과 성명서, 심지어 법정에서 한 말까지 모두가 정부와 대화하려고 한 것이었어. 밀실에서 대화하는 것은 난 별로 흥미가 없으니, 국민이 다 들을 수 있는 대화를 하자구.”라고 했더니, 그건 곤란하다고 했습니다.
쫴 긴 시간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지금 하는 이야기가 청와대에 보고되나?”하고 물었더니, 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받아쓰라고 하면서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과도 선거 내각을 임명하고 공정한 선거를 거쳐서 평화적인 정권 교체를 해야 한다. 그리되면 박 대통령은 평화적인 정권 교체를 한 첫 대통령으로서 청사에 길이 빛나는 발자취를 남기게 된다. 그렇게만 해 준다며, 나는 그를 찬양하는 시를 바치겠다.” 이것을 받아쓰고는 머리를 쳐들어 나를 건너다보면서 그가 하는 말이 “문 목사님, 박 대통령을 극진히 위하시네요.”라고 하더군요. 제 심정이 그의 가슴에도 전달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해 8.15 국민연합 성명에 우리는 이것을 공식적인 요구조항의 하나로 담았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박 정권의 대답은 저를 감옥으로 보내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저는 너무 순진했던 것 같습니다. 정치 현실이 얼마나 냉혹하다는 걸 아무렴 그리도 몰랐을까 싶으시지요? 사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조차 쑥스럽다 못해 창피하게까지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게 문익환이라는 사람의 됨됨인 걸 어떻게 합니까? 나를 거듭거듭 감옥에 쳐넣는 사람들을 향한 제 심정이 그렇다면, 김영삼 씨를 생각하는 제 마음이 어떠하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이 앞으로 우리 민족사에 차지할 몫이 막중하기 때문에 그분이 훌륭한 지도자가 되도록 조금이라도 돕는 일이 어찌 작은 일이겠습니까? (다음 편지로 계속)
79년에 중앙정보부 간부와 나누었던 성공적인 대통령을 만들기 위한 제안에 대한 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