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께
민자당 216석 중 의석을 지킨 사람이 48명밖에 없었다는 기사는 민자당 국회의원들의 자세를 폭로하는 일이 아닐 수 없군요.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는 그 마음씨들, 한심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군요. 뉴질랜드에서는 국회 회의가 시작되면 아예 밖에서 문을 잠가버린다는데, 그런 법이라도 상정했으면 좋겠다고 동환에게 전화하시오.
오늘 이상덕 씨를 보면서 나의 오랜 기도가 이제 정말 이루어진 것 같아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군요. 이번 징역 생활이 또 이렇게 큰 결실을 거두다니,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지 않을 수 없군요. 드디어 이 썩은 사회의 맨 밑바닥에서 새 살이 솟아나는군요. 어찌 감사하지 않으리오? 이건 정말 30배도 아니요, 60배도 아니요, 100배도 아닌 천배 만배의 결실이요, 축복이군요. 이래서 나의 하루하루는 축복이요, 보람이요, 기쁨이군요.
당신의 사랑
박원순 변호사님께
(전날 편지에서 계속) 1983년에 김영삼 씨가 23일 단식 투쟁을 했을 때, 저는 그분을 처음 만났고 대번에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분이 단식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저도 지원 단식을 하고 싶었으나, 몇 사람 같이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에 이문영 박사가 지원 단식을 하자고 제안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박사는 단식에는 통 자신이 없는 분이신데, 그런 제안을 하는 걸 듣고 김영삼 씨의 단식이 꽤 큰 충격을 사람들에게 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이 박사와 의논하고 함석헌 선생, 홍남순 변호사님, 예춘호 씨에게 의논했더니, 다들 쾌히 승낙했습니다. 우리 다섯 사람의 지원 단식은 18일 계속되었습니다. 함 선생님은 팔순이 넘으셨고, 홍 변호사님은 칠순이 넘으셨는데, 18일 단식이라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다섯은 어느 편에 가까우냐고 하면 상도동보다는 동교동에 가깝다고 해야겠지요.
함 선생님과 이문영 박사와 저는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김대중 씨와 같이 재판을 받았고, 홍 변호사님은 그때 최고령 원로 변호인이었습니다. 예춘호 씨와 이 박사와 저는 80년 5.17 사건으로 김대중 씨와 같이 피고석에 앉았던 사이거든요. 이 사실은 김영삼 씨에게는 작지 않은 충격이었을 겁니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의 단식을 격려하여 찾아온 인사들이 상도동계보다도 동교동계가 더 많았다는 것이 비서들의 말이었습니다. 저는 아버지, 어머니까지 동원해서 그의 단식을 지원했었습니다.
단식을 끝내고 그는 윤보선 씨, 유진오 씨,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보고 네 번째로 저를 찾아왔습니다. 저와 절친한 동지들은 윤보선 씨부터 찾아보는 사람을 무엇 하러 만나느냐고 반대하였지만, 저는 그를 집에서 만났습니다. 그 세 분을 먼저 찾아 만난 것은 단식 중에 찾아와 격려해 준 일에 답례하는 형식을 갖추려는 게 목적이 있었던 것을 양해해 달라고 했습니다. 내가 동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기를 만난다는 걸 알 까닭이 없었는데, 그런 말을 한 것은 그의 마음이 어떠했느냐는 걸 잘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그날 이야기 중에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김대중 씨는 나보다 나이도 위고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고생도 더 많이 했기 때문에 앞으로 그분을 중심으로 일을 해야지요.” 이것은 단식을 하면서 정말 마음을 비우고 한 말이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의 단식 기간 김대중 씨는 매일 김영삼 씨에게 격려 전보를 쳤다는데, 물론 한 장도 전달되지 않았지요. 그걸 알았다면 더 감격했을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저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80년에 3김이 경쟁할 때, 저는 김대중 씨에게 사퇴를 종용하면서, 김 총재를 밀 것을 강하게 권했으나, 다음번에는 김 총재님께 김대중 씨를 밀어달라고 부탁을 드리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총재님께서 그 말씀을 먼저 하시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김 총재님은 대통령으로 민족사에 기여하는 것보다 영호남의 지역감정 해소에 몸을 바쳐 일하시는 것이 더 크고 더 근본적인 기여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광주의 비극을 풀기 위해서 김대중 씨를 정점으로 민주 전선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영호남 지역감정을 해소하는 첫걸음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김영삼 씨가 민족사에 기여할 수 있는 최대의 공헌이라는 점에 우리는 합의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당은 총재님이 맡으시고, 행정은 김대중 씨에게 맡기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했던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음 편지로 계속)
83년 김영삼의 23일 단식을 통해 그와 가까운 사이가 된 얘기를 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