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8.15 김대중•김영삼 공동 성명 - 민추협의 계기

당신께

 

모란봉에서 만난듯한 소나무들이 창가에서 기웃거리는 걸 보면서 나는 콧날이 시큼한 걸 느꼈다오. 묘향산에서 만났던 봄기운을 거느린 싸늘한 찬 바람에 흔들리면서.

밀려오는 봄 누가 막으리오. 봄이 오면 얼음은 녹기 마련인 거고.

 

바보 같은 당신의 늦봄

 

박원순 변호사님께

 

(전날 편지에서 계속) 김영삼 씨는 그 뜻을 김대중 씨에게도 여러 차례 토로했던 것 같습니다. 86년 11월 5일 김대중 씨의 ‘직선제 개헌 조건부 불출마 선언’에 즈음해서 그는 “김 의장이 사면, 복권되면 그를 대통령 후보로 지지하겠다고 작년부터 몇 차례 김 의장에게 밝힌 적이 있으며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다”고 하는 말을 듣고, 저는 그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10.26 뒤 나는 대통령이 되어 꼭 단임 4년을 하고 물러나고 싶었다. 그러나 83년 단식 투쟁을 통해 대통령을 하겠다는 욕심을 버렸고, 이렇게 욕심을 버리게 해 준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싶다.”는 말을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저는 그의 진심이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면 그는 이 진심을 왜 스스로 뒤엎음으로써 자신의 생애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겼는가? 그 점에서 김대중 씨도 꼭 같은 오점을 남긴 것이 사실이지요. 저는 여기서 두 분의 인간적인 한계를 봅니다. 자기들을 지지하는 세력들에 상당 부분 불순한 지역감정이 있다는 걸 간파하고 이를 제어할 수 있었어야 합니다. 그 점에서 두 분 다 지도력의 한계를 노출했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두 분의 인간적인 한계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저 자신 그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적인 한계를 통절하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인간적인 한계를 통절하게 느끼면서 발견한 사실은 그 두 분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 지역감정의 희생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의 단식과 우리의 지원 단식을 계기로 저와 김영삼 씨는 격의 없는 동지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가 조금이라도 더 나은 지도자가 되도록 도와 드릴 기회를 얻었습니다. 나는 기꺼이 그의 측근이 되었습니다. 김대중 씨와 문동환이 망명이 풀려서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신문들은 동생은 동교동계요, 형은 상도동계라고 공공연히 활자화할 정도였습니다.

그의 측근으로서 한 첫 일이 83년 8.15 김대중•김영삼 공동 성명이었습니다. 이것이 민추협을 탄생시키는 계기를 마련했고 신민당 → 2.12 총선의 대승으로 이어졌습니다. 80년 5월 광주의 충격은 너무 컸더군요. 감옥에서 나와 보니까, 재야 운동권 재건 운동이 그 충격 때문에 쉽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외국 사람들만 만나면 대체 세력이 있느냐는 질문을 계속 받아야 했습니다. 대체 세력이 없으니까 전 정권을 받아드리라는 무언의 충고였습니다. 그래서 두 김 세력을 묶어 대체 세력이 여기 있다는 걸 보이고 싶었습니다. 먼저 김대중 씨의 의견을 편지로 물었더니, 모든 걸 저에게 일임한다는 회답이 왔습니다. 그래서 김영삼 씨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쾌히 승낙하였습니다. 공동성명서의 문장은 저의 것이었습니다. 김영삼 씨가 보고 좋다고 해서 워싱턴으로 김대중 씨에게 보내서 같은 시각에 서울과 워싱톤에서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령탑이 없는 동교동 쪽으로서는 적잖이 불안했으리라는 건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김영삼 씨를 김대중 씨와 동격으로 올려놓는 일이 아니냐? 밥상을 차려서 김영삼 씨에게 바치는 것이 아니야? 이런 투덜거리는 소리가 저의 귀에 들려오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행이었던 것은 김대중 씨가 제가 하는 일을 믿어주었던 겁니다. 그래서 84년 5월에는 민추협이 간판을 내걸게 되거든요. 이건 물론 김대중 씨의 동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지면이 다해서 오늘은 여기까지만 쓰겠습니다. (다음 편지로 계속)  

 

문익환 올림

 

83년 8.15 김대중•김영삼 공동 성명이 나온 배경과 두 분의 인간적인 한계를 경험한 것, 우리 모두 지역감정의 희생자라는 생각을 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