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께
오늘 나는 차풍길 씨 가족 옆에 마음으로 가서 앉아서 감사 예배를 드렸다오. 그 가족 모두모두 앞으로 하루하루의 삶에서 몇 갑절 축복을 누리기를 바라오. 지난 세월이 억울하고 쓰라렸던 만큼 몇 갑절 축복을 누릴 당당한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부영 씨, 김근태 씨 등이 전민련에 남아 전민련 강화에 주력이 될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 정말 기쁜 소식이군요.
당신의 사랑
박원순 변호사님께
(전날 편지에서 계속) 민추협의 탄생은 그 시점에서 바랄 수 있는 최대의 성과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민추협은 탄생하자마자 일대 위기에 봉착합니다. 그것은 김영삼 씨의 위기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84년 정초에 기자회견에서 내각책임제 개헌 이야기를 했을 때만 해도 별 물의 없이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전두환 정권이 민주주의만 해 준다면, 광주 문제를 용서할 수 있다는 김영삼 씨의 발언은 탄생한 지 얼마 안 되는 민추협뿐 아니라, 전 재야를 박살 내버릴 수 있는 폭발적인 발언이 되었습니다.
광주가 그 발언을 그냥 넘겨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이때는 이미 전두환 정권 타도의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는 때였습니다. 이 발언에 비추어서 내각책임제 개헌 발언이 해석되고 보면, 김영삼 씨는 전두환 대통령 아래서 국무총리를 하려는 거라는 해석이 충분히 나올 수 있었습니다.
하루는 광주의 어른 홍남순 변호사님에게서 인편으로 편지가 왔습니다. 제가 나서서 수습해 주어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날 정동년 씨가 찾아와서 같은 요청을 했습니다. 그래서 김영삼 씨를 만났습니다. 사과가 아니라 해명하러 광주에 한 번 갔다 오실 수 없겠느냐고 물었더니, 절대로 안 간다고 했습니다. 성토문을 돌려놓고 사과하라는 데가 어디 있느냐고 했습니다. 감정이 극도로 격화되어 있었습니다.
“총재님, 제 말을 잘 들으세요” 하면서 설명해 드렸지요. “저도 같은 말을 지난 일 년 동안 해왔습니다. 저의 그 말에 광주 시민은 박수를 쳤습니다. 김대중 씨는 전두환 정권이 민주주의만 해준다면, 나와서 협력하겠다고까지 말했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광주 시민들이 아무 이의를 제기하지 않다가 김 총재가 그 말을 하니까 들고 일어서는 까닭을 아시겠습니까? 우리 둘은 광주와 같이 수난을 겪었지만, 김 총재는 그게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도 이미 시효가 지났습니다. 저도 지난 5월 이후로 그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정치적인 대의명분을 내세워서 설득하여 보았습니다. “총재님, 단식 끝나신 다음에 저의 집에 오셨을 때, 우리가 합의한 게 있지 않습니까? 김 총재님의 최대의 정치적인 사명은 영호남 지역감정을 해소하는 일이라고. 지금 광주로 가신다면, 바로 그 일을 하러 가는 것입니다.” 제 입에서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예, 가지요.”라고 그리도 쉽게 저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이 양반 정말 영호남 지역감정 해소를 자기가 짊어져야 할 최대의 정치적인 사명이라고 느끼고 있구나 하는 걸 그때 저는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내각책임제 개헌을 제안한 의도가 전두환 대통령 아래서 국무총리를 하려는 데 있지 않았다는 건 저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신년 기자회견이 있고 다음 날 만나자고 해서 시내 어느 요정에서 예춘호 씨와 같이 만난 일이 있습니다. 그때 그는 실권이 있는 국무총리를 김대중 씨가 맡고 아무 실권이 없는 대통령직을 자기가 맡는 방식으로 직책을 분담하는 게 문제를 푸는 길이 아니겠느냐는 걸 암시하더군요. 예춘호 씨도 저도 “다시는 내각책임제 개헌 이야기는 입 밖에도 안 내시도록 하는 게 좋겠습니다”고 일치된 의견을 말해 드렸습니다.
오늘은 이만 붓을 놓습니다. (다음 편지로 계속)
문익환 올림
1984년초 김영삼 씨의 광주 문제에 대한 발언으로 야기된 광주 사람들과의 갈등을 해결한 과정을 기술 - 첫번째 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