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께
김세일, 홍범도를 잘 읽었습니다. 최봉설 씨 일행이 아래 강동 신한촌에서 학교를 한다고 집까지 마련해 놓았다는 건 처음 듣는 이야기군요. 과연 그랬을까요? 홍범도라는 민족의 영웅을 레닌 앞에 선 어린 양으로 만들어 버린 데서 민족적인 긍지가 유린당한 것을 느낍니다. 우혜가 다루어내야 할 문제가 보통 심각한 게 아니라는 느낌이 듭니다. 작가 송우혜에게 거는 기대가 큽니다. 건투를 빕니다.
아들 드림
박원순 변호사께
(전날 편지에서 계속) 영호남의 지역감정 해소라는 대의명분이 얼마나 중요하냐는 걸 그때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 대의명분 앞에서 주저 없이 광주로 갈 결단을 내리는 김영삼 씨가 제 눈에 거인으로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죠. “제가 먼저 갔다 오겠습니다.”는 말로 이야기를 끝내고 다음 날 광주로 내려갔습니다. 제가 혼자 내려온 걸 보고 홍 변호사님은 저으기 분노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곧 유가족 대표, 부상자 대표 등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문제가 보통 심각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변호사님도 쉽게 짐작하실 수 있죠?
그 격분했던 감정이 또다시 대의명분 앞에서 눈 녹듯 녹는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광주 80년 5월은 민주주의를 되살리려는 광주 시민들만이 이룩할 수 있었던 위대한 역사입니다. 저는 이 위대한 역사가 지역감정으로 해석되는 것은 지극히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김영삼 총재에 대한 광주의 반응은 너무 감정적입니다. 지역감정의 폭발로 오해받을 가능성이 없지 않습니다.” 광주 민중 항쟁의 빛나는 역사에 자그마한 오점이라도 남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대의명분 앞에서 광주 시민은 금방 냉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민족사에서 부마 민중 항쟁과 광주 민중 항쟁은 한 산맥의 두 거봉이라는 것, 광주 민중 항쟁을 김대중 씨와 끊어서 생각할 수 없다면, 부마 민중 항쟁은 김영삼 씨와 끊어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광주는 김대중 씨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만큼 김영삼 씨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말했을 때, 광주는 이 또한 수긍하지 않으면 안 될 대의명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광주를 떠나 서울로 올라오는 저의 마음은 한없이 기쁘고 가벼웠습니다. 올라와서 만난 김영삼 씨는 뜻밖에도 침통한 모습이었습니다. “저 광주로 못 가겠습니다. 동지들이 결별 선언을 했습니다. 광주로 간다면 다시 자기들을 만날 생각을 말라고 합니다.” 저는 이 말에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주저앉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말해 보았습니다. “총재님, 지금이야말로 총재님의 지도력을 발휘할 때입니다. 그들에게 끌려갈 겁니까? 그들을 끌고 갈 겁니까? 이번에도 지체없이 가겠다는 결단을 내리더군요. 자기가 명분을 잡고 있는 한 끌고 가야 한다는 판단이 섰던 겁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는 같이 광주로 가게 되었습니다. 홍 변호사님 댁에 다다라 홍 변호사님의 마중을 받으면서 김영삼 씨는 “선생님, 저 매 맞으러 왔습니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눈물이 콱 쏟아지려는 걸 가까스로 막을 정도로 감격스러운 장면이었습니다. 매 맞으러 왔다는 사람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야기는 쉽게 그리고 원만하게 끝났습니다. 어려운 위기를 이렇게 해서 넘길 수 있었습니다.
이 역사적인 화해에 실망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전담반까지 구성하고 이 기회에 민추협을 깨려고 발 벗고 나섰던 안기부에 철퇴가 안겨졌습니다. 오늘은 이만 각필합니다.
(다음 편지로 계속)
문익환 올림
1984년초 김영삼 씨의 광주 문제에 대한 발언으로 야기된 광주 사람들과의 갈등을 해결한 과정을 기술 – 두 번째 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