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께
유엔에 단독으로라도 들어가려니 90여 개국이 가입해 있는 유엔 인권 협약에도 가입되어 있지 않다는 게 걸림돌이 되어 있었나 보죠. 이제야 서둘러 가입하려는 걸 보면서 한심하고 따분한 느낌마저 드는군요. 북쪽은 79년에 이미 가입했는데, 머지않아 선진국을 향해서 발돋움한다는 나라가 수많은 후진국이 다 들어가 있는 유엔 인권 협약에 이제야 들어가다니. 몇 해 전에 그 기구의 감시를 거부한다는 조건으로 가입하려다가 실패한 일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 감시를 받을 것을 승인하기로 했군요.
유럽에서는 동독의 선거를 고려해서 나토(NATO) 군사 훈련을 중지한다는데, 우리는 팀스피리트 훈련을 강행한다니 안타깝군요.
소혜자 님께 편지 고맙다고 전해 주시오. 저번 편지에 콜 수상이 너무 서두른다고 썼는데, 그게 사실로 드러나는군요. 그러나 독일이라도 빨리 통일이 되어야 우리의 통일도 그만큼 앞당겨질 테니까 두 손 모아 빌자고 전해 주시오. 어제저녁 한국의 밤이 감격스러웠다고. 수고한 사람 모두에게 치하해 주시오.
박원순 변호사께
두 분 다 지지 세력을 제어하면서 사퇴할 마음도 없고 할 힘도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두 분의 인간적인 한계와 지도력의 한계가 노출된 셈입니다. 이리되면 국민의 뜻과 힘이 어느 한 쪽을 밀어줌으로 약세가 드러난 후보자와 그의 지지 세력이 사퇴를 결의하도록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이것이 민주 방식의 정도이기도 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마음을 잡고 있던 차에 민통련이 두 분을 모셔다가 정책 질의를 하자는 의견이 나와서 별 이의 없이 결의하고 두 분을 모시고 정책 질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민통련이 어느 한 쪽을 선택한다는 걸 전제한 일이었습니다. 김대중 씨는 쾌히 승낙했지만, 김영삼 씨는 참모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참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를 나오도록 노력해서 성사시킨 것이 바로 계훈제 선생이었습니다.
막상 선택하는 단계에 와서 민통련 지도부는 분열의 양상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나는 사회자로서 투표를 유보하려고 했는데, 김대중 씨를 지지하지 않는 쪽에서도 투표를 하자고 하기 때문에, 모두 투표의 결과에 승복하리라고 믿고 투표에 부쳤던 건데, 결과는 민통련의 분열이라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이 분열은 군정 종식을 이룩하지 못한 책임을 우리에게 안겨주었고, 선거 후에는 부정 선거 무효화 투쟁도 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 실패를 만회하는 길은 총선에서 전 재야 세력이 뭉쳐서 민정당을 꺾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민주, 평민, 한겨레 당을 통합함으로 좌절감에 빠진 국민에게 새 희망을 불어넣어 주어 야당 국회를 만들므로 전화위복의 길을 트는 것이 우리 모두 사는 길이었습니다. 이건 절체절명이라고 느꼈습니다.
이리하여 저와 김영삼 씨의 접촉이 다시 시작됩니다. 저는 민주당 총재직을 내던지고 어디 숨어버린 김영삼 씨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민주당이 소선거구제를 받아들이면서 야당 통합에 응하도록 민주당에 영향력을 행사해 달라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를 가지고 간 분이 서경석 목사였습니다.
김 총재는 저의 편지를 받고 나와서 민주당이 소선거구제를 받아들이고 통합에 응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해 주었습니다. 이에 호응해서 평민당은 김대중 총재를 이선으로 후퇴시키고 박영숙 부총재 체제로 통합 논의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선의 불신과 상처가 아물기에는 너무 시간이 짧았습니다. 그래서 3당 연합 공천이라도 성사시켜 보려고 최선을 다 해 보았지만, 그것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김 총재를 찾아 상도동으로 가서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습니다. 나 때문에, 내가 김대중 씨를 지지했기 때문에, 대통령이 될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하고 원한에 사무쳐 있는 김영삼 씨가 내 편지를 받고 산에서 내려와서 민주당을 야권 통합 쪽으로 움직였고 나와 장시간 이야기를 나누고 내가 그 집을 나설 때는 대문 밖까지 나와서 배웅해 주었습니다. 그 심정을 생각하면서 제 가슴이 어찌 아프지 않겠습니까?
모든 것은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국회는 민정당 의원이 산사태처럼 밀려들어 판을 치는 곳이 되겠구나, 민주화 투쟁은 10년 20년 전으로 돌아가 새로 시작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그러나 국민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좌절하고 주저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여소야대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저희를 그렇게도 실망시켜 준 야당 정치인들에게 다시 용기를 불러 넣어주고 설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속죄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민정당까지도 여소야대를 국민의 뜻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할 만큼 국민의 뜻은 뚜렸했고, 그 힘은 컸습니다. 이 국민의 민주 의식과 역량을 믿고 살아왔지만, 이제 그 믿음은 반석과도 같이 확고부동한 것이 되었습니다. 이 국민을 가지고 민주주의를 못 한다는 건 억지 떼인 거죠. 이 국민의 뜻을 거슬러 여대야소를 만들면서 하는 정치가 어찌 되리라는 건 불을 보듯 너무나 환합니다.
이 국민은 또 어디선가 역사의 새 장을 열 겁니다. 어떻게? 그건 아무도 모르죠. 그걸 믿지 않고 이 징역살이를 따분해서 어떻게 합니까? 오늘은 이만 총총.
문익환 올림
1987년 대선 과정에서 민통련이 겪은 분열에 대한 아쉬움과 1988년 총선의 결과로 국민의 힘을 믿게 된 과정을 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