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깨
내일이 이렇게도 기다려지다니. 우선 김병곤 씨 소식이 안달이 날 정도로 궁금하구요. 어제 한국의 밤 이야기가 무척 듣고 싶군요. 오늘 저녁에 있을 출판 축하회 소식도 듣고 싶구요.
오늘 안성례 씨가 접견이 허락되지 않아 그대로 발길을 돌리자니 얼마나 섭섭했을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 세상에는 하도 많아서 이젠 화를 낼 근력조차 없군요. 정말정말 섭섭하군요.
그러면 내일 만납시다.
당신의 늦봄
박원순 변호사님께
4당 체제이기는 해도 여소야대 국회는 그 시점에 국민이 올릴 수 있는 최대의 승리였지요. 최선은 아니어도 차선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백인들의 정치 철학에서는 정치적인 선택은 최악을 피하고 차악을 택하는 일이라고 한다지만, 그것은 분명 차악 정도가 아니라 차선은 되는 것이었습니다.
정치인들은 이 국민의 승리, 그것이 어떻게 얻은 승리입니까? 그 승리에 밀려서 순풍에 돗단듯이 민주•통일의 항로를 열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4당 제도가 망국의 길로 보이다니, 그래서 구국의 길로서 3당 통합을 했다니, 망발이라도 이런 망발이 어디 있습니까? 기왕 3당 통합을 할 바에는 민주•평민•공화를 하나로 묶어 거대 야당을 만들었다면, 그야말로 차선을 최선으로 끌어올리는 일 아니었겠습니까?
국민이 진정 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랬더라면 민정당도 국민의 뜻 앞에 무릎을 꿇고 민주•통일의 대도를 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 아닙니까? 동시에 영호남의 지역감정을 단번에 해소하는 대업을 성취할 수도 있었을 거구요. 그야말로 민족에 巨山이 될 절호의 기회를 그는 놓쳐버렸습니다. 정말 정말 “아! 오호통재(嗚呼痛哉)라” 입니다.
巨人이 될 기회를 놓친 정도가 아닙니다. 김대중 씨와 도토리 키재기를 하는 소인이 되어 엉뚱한 잔칫집 들러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멎는 것이 아닙니다. 영호남의 지역감정을 더욱 악화시킨 장본인이 되었구요, 민족사를 제5공화국 시대로 돌려놓은 죄악을 저지른 역사의 죄인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인격을 파산시킨 인격 파산자라는 것 더 말할 것도 없구요.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그에게 애정과 정성을 쏟았던 만큼 저는 가슴이 아픕니다. 정말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저는 아직도 김영삼 씨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람은 관뚜껑을 덮고서라야 평가를 할 수 있으니까요. 4.26 총선에서 여소야대를 만들어 준 국민의 뜻이 무엇이었느냐는 걸 분명히 보기만 하면, 그리고 그 뜻에 승복할 마음만 있다면, 아직은 희망이 있습니다. 나는 그가 가룟 유다의 최후가 아니라 삼손의 최후를 따라감으로 죽어서 사는 민족의 지도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김영삼이라는 풍운아 하나가 죽어서 사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이 민족의 무덤을 헤치고 부활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에게나 이런 자리가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자리가 김영삼 씨에게는 주어졌습니다. 이것까지 놓쳐버리면 그는 가룟 유다가 되고 맙니다. 저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리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를 위해서, 또 민족을 위해서. 자기의 몸으로 민족의 부활이 되는 죽음을 살아 줄 것을 두 손 모아 빕니다. 그의 생이 또 하나 실패작이 된다고 민족이 실패할 것은 아닙니다. 저는 이 민족을 믿습니다. 민주로 민중이 부활하고 통일로 민족이 부활합니다. 김영삼 씨는 민주와 통일로 민중과 함께, 민족과 함께 부활한다면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상으로 김영삼 씨에 관해서 쓰고 싶은 이야기를 다 썼습니다.
문익환 올림
김영삼의 3당 합당을 통열하게 비판하고 그가 죽어서 민족을 살리는 삼손의 길을 가기를 바라는 희망을 피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