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이 제대로 인권을 수호해 주는 법치국가

봄길님

 

3월28일에 157신이 나가고 그동안 158.159신 둘이 나갔으니, 거의 한 달 동안 편지 공백이 있은 셈이군요. 오늘 새벽 두 시로 “끝”을 내고 나니 어깨에서 무거운 짐을 부린 것 같은 홀가분한 기분, 생활이 정상으로 돌아온 셈이죠. 평양 행을 앞에 놓고 마음에 저울질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작년 4월 13일 김포공항에서 안기부로 끌려 가기까지의 정확한 역사를 쓴다고 써놓고 보니 기행문이 되어버렸군요. 아무려면 어때요? 지금까지 항소 이유서 세 번, 상고 이유서를 세 번 썼군요. 다섯 번 구속에 한 번은 기소 중지, 집행유예 정지로 재판을 안 받았으니까, 그런 거 다 필요 없었고, 한 번은 항소 포기했으니까. 쓸 필요가 없었고. 세 번 항소 이유서, 두 번 상고 이유서는 다 호소하는 내용이었는데, 이번에는 전혀 그럴 생각이 아니어서 역사를 쓴다는 게 기행문이 되었군요. 다섯 번을 호소문을 쓴 셈인데, 그 호소문이라는 게 죄를 너그럽게 보아 달라는 호소문이 아니라, 바른 재판을 해서 사법부의 권위를 세워달라는 호소였어요. 법이 제대로 인권을 수호해 주는 법치국가에서 살게 해 달라는, 나의 사랑하는 조국이 무법천지로 세계의 눈에 보이지 않게 해 달라는 호소였지요.

사법부야 듣든 안 듣든 호소하고 호소하는 것이 국민 된 도리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만은 정확한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언젠가 써야 할 나의 회고록의 일부가 되겠죠. 얼마 전 박원순 변호사에게 김영삼 씨와 나의 관계를 써 보낸 편지들도 나의 회고록의 일부이구요. 내가 이렇게 회고록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대선의 소용돌이 속에서 난세를 살아간 선인들의 회고록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 정말 아쉬웠기 때문이었다오. 상고 이유서를 다 썼으니까 이제 자주 편지를 쓰겠기에 오늘은 이만. 

문 수녀님께로 붓을 돌리리다.

 

당신의 늦봄

 

문 수녀님

 

늘 웃으시는 눈빛 보고 싶구요. 그 맑은 목소리 듣고 싶습니다. 아니, 눈만 감으면 수녀님의 웃으시는 밝은 눈가, 눈에 환히 보이고 그 맑은 목소리가 제 귓가에 쟁쟁히 울려옵니다.

『생활 성서사』가 저에게 『히브리 민중사』를 연재할 지면을 허락해 주셔서 얼마나 좋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쁜 일정에 쫓기면서 수녀님의 독촉을 받으면서 한 달에 한 번씩 40매 원고지를 메워가는 일이 제게는 그대로 행복이었습니다.

86년 5월에 시작된 넷째 번 징역 생활로 한 번 중단되었다가 또다시 중단된 채 아직은 미완성인데, 三民社가 미완성인 채 책을 만들겠다고 떼를 써서 허락했습니다. 언젠가 수녀님의 독촉을 받으면서 나머지를 생활 성서에 연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히브리 민중사가 두 번씩이나 저의 징역살이로 중단되었다는 것은 어쩌면 걸맞은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셉의 징역살이로 시작된 히브리 민중사가 징역살이 예언자 예레미야에서 중단되었다는 것은 그냥 우연이라고 보아 넘기기에는 너무나 깊은 같은 경험이 히브리 민중사와 우리 민족사 사이에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생활 성서의 독자권에서 훨씬 더 넓은 독자층의 읽을거리로 히브리 민중사가 퍼져나가는 것을 수녀님은 손뼉 치며 기뻐하시리라 믿습니다. 생활성서에 책 광고도 내주시겠지요?

생활 성서의 편집인들과 독자들에게 머리 숙여 고마움을 표하면서.

 

통일염원 46년 4월26일    문익환 올림

 

아내에게는 이번 상고 이유서가 기행문이 되었지만, 회고록을 쓰는 심정으로 썼다는 얘기를, 문 수녀님에게는 히브리 민중사를 연재하도록 해준 데 대한 감사와 단행본으로 출판하게 된 데 대해 양해를 구하는 얘기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