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악순환을 청산한 곳에만 평화의 왕국이 가능하다

봄길님

 

오늘 아침 누가복음 13장 33절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 한다.” 이 구절이 동주 「서시」의 한 구절이라는 걸 발견했군요. 앞으로 만해 한용운 스님, 윤동주의 시편 들을 관통하는 가락이 ‘슬픔’이라는 걸 편지로 계속해서 써보고 싶군요. 만해의 『님의 침묵』, 동주의 시집을 넣어 주시오.

어제 예수와 무력 항쟁파의 관계를 바둑으로 조명해 보았는데, 좀 더 자세히 써보지요. 왼쪽 아래 귀에서 붙은 싸움에서는 백이 분명히 깨지게 되어 있는데, 그 싸움을 계속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요. 그럴 때는 그걸 내버려 두고 오른쪽 위 귀든 아래 귀든 어디 전연 엉뚱한 데서 작전을 개시하죠. 예수님 당시 무력 항쟁파의 투쟁은 분명히 깨지는 투쟁이었거든요. 깨지면서도 승산이 있는 투쟁도 있어요. 지금 나의 투쟁이 그런 거지만. 그런데 예수가 갈릴리 어중이떠중이들, 천덕구니들과 같이 시작한 일, 3백 년 후에야 로마를 뒤엎는 데 성공한 일,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게 바로 사회의 밑바닥 인생들에게 그들이야말로 하늘나라의 주인공이라는 확신을 일깨워 주는 일이었지요. 자기들이 주인이 되는 천국을 지상에 세우는 일에 눈을 뜨도록 도와주는 일이었다는 말도 되구요. 그것이 바로 정의를 세우는 일이요, 정의에 떠받들리는 평화의 나라였죠.

무력 항쟁파들과 예수의 다른 점은 전략적인 차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죠. 예수의 길은 어디까지나 평화에 이르는 평화의 길이었으니까 무력 항쟁파와는 본질적으로 같을 수 없었죠. 그들과 예수의 차이는 전쟁으로 해방에 이르느냐 평화의 길로 해방에 이르느냐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었죠. 해방된 약자들이 주인 되는 방식에서도 근본적으로 달랐다고 봐야 할 것 같군요. 무력 항쟁파의 꿈은 해방과 함께 자기들이 지배자가 된다는 것이었죠. 예수와 같이 3년 동안 고락을 같이한 제자들마저도 메시아 왕국에서 누가 좌의정을 하느냐 우의정을 하느냐는 것으로 다툴 정도였으니까 알 만하잖아요? 새 주인은 지배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자가 되는 것이라는 게 예수의 신념이었죠.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악순환을 청산한 곳에만 평화의 왕국이 가능하다는 거죠.

그런 점에서 예수의 참 제자들은 여자들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강증산이 제 부인을 증산교의 교주로 세우려고 했다는 점은 예수님보다도 더 투철한 면이 아닐까 싶군요. 여성 해방이 인류 해방의 마지막 단계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은 이만.

 

당신의 늦봄

 

호근아!

 

책이고 잡지고 읽을 시간 없이 뛰는 네게 잡지의 한 토막을 들려주고 싶구나.

“우리 생활 속엔 음악이 있다. 사람이 태어나거나 죽을 때에도 음악이 울리고 있다. 모든 인생 항로는 음악 속에서 진행된다. 음악은 사람을 하느님께로 가게 한다. 사람들 마음엔 선과 악이 존재한다. 음악은 인간이 ‘선’만을 일으키게 한다.”

“지휘자는 목사와 비슷하다. 왜냐하면 청중들이 죄악을 잊고 고통을 잊고 오직 저 높은 곳을 향한 생각을 하게 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저 높은 곳에는 하느님이 계신다.”

이것은 『객석』 5월호 커버 스토리의 주인공 유리 헤미르카노프의 말이다. 유물론과 무신론 나라의 최상의 오케스트라 ‘레닌 필’의 지휘자의 말이라니, 세상이 달라져도 한참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니? 하느님의 영(靈)이 역사 속에서 움직이신다는 게 눈에 보이는 듯하지 않니?

너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점이 있지. 음악이 죄와 고통을 잊게 하다니! 하느님이 하늘에 계시다니! 이건 나도 동의할 수 없다. 우리의 음악은 인류의 죄와 고통을 생생하게 느끼게 해주면서 이의 극복을 위해서 떨쳐 일어나게 해주어야 하니까. 하늘이라는 개념도 땅과 유리된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니겠니? 지구 자체가 하늘 속을 떠도는 것이니까. 안 그렇니?

아무리 바빠도 먹을 건 먹고 쉴 땐 쉬면서 일해라.

 

아빠 씀 1990. 5. 7.

 

 

아내에게는 예수와 당시 무력 항쟁파의 차이와 함께, 예수의 길이 평화의 길이었다는 것을 설명함. 아들에게는 음악 잡지에서 읽은 기사 중, 동의할 수 없는 면을 얘기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