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길님
오늘 같은 날은 내가 정말 갇혀 있다는 걸 실감하는군요. 밖에 있었으면, 당신과 당신 언니, 순열이 그리고 우리 아이들과 같이 객석에 앉아 명훈의 음악을 한껏 즐기는 건데. 당신도 오늘 같은 날은 내가 옆에 없는 것이 꽤나 서운하겠지요. 저번 언니에게 한 편지대로 비디오테이프를 구해서 갖다주면 여기서도 감상을 할 수 있겠지만, 성근의 비디오테이프도 감감무소식이군요. 어찌 된 건지? Faye, 영미, 영금, 의근이네도 다 떠났겠지요?
며칠 전 신문을 보니까 수경이 위가 나빠서 고생한다는데, 가슴이 아프군요. 빨리 큰 병원에 나가서 진단이라도 받게 해야 할 텐데. 병이라고는 없을 듯이 싱싱하고 건강해 보였는데, 웬일이지요? 우리 모두의 꽃이 병들어서야 되나요? 빨리빨리 손을 써야지요. 위해서 기도한다고 소식을 전해주시오.
당신의 사랑
김관석 목사님
수고가 많습니다. 신문을 하랴, 야권 통합 운동을 하랴, 부자유스러운 몸을 가지고. 옥실 씨는 요새 어떤지? 신문하는 벗들에게, 야권 통합 운동하는 동지들에게 뜨거운 격려의 박수를 보냅니다.
오늘 『시사저널』의 대담을 잘 읽었습니다. 한마디 뺄 말이 없는 훌륭한 대담이었어요. 김 목사의 실력을 다시 평가하게 되었습니다. 전적으로 동감 동감. 그러나 내가 김 목사의 자리에 있었다면, 지역감정 해소 문제를 더 부각했을 겁니다. 망국병인 지역감정을 한 솥에 넣어 푹푹 고아내는 운동으로 야권 통합 운동에 임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주문입니다.
또 하나, 민족 통일 운동의 예행연습으로 야권 통합 운동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번에 야권 통합이 실패하면 민주 통일을 말할 자격도 없다는 비장한 각오로 대승적인 자세로 임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고 싶군요.
89년 총선거 직전에 야권 통합을 위해서 김 목사의 방에서 몇 차례 모였었지요. 모두 다 물러선 다음에도 혼자 외롭게 뛰었지만, 결국 모든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지요. 그때의 나의 심정은 한마디로 깜깜한 그믐밤이었거든요. 민정당 국회의원이 산사태가 나서 국회로 쓸려 들어가 국정을 좌지우지하게 될 게 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거든요. 한국 국민에 대한 나의 신뢰가 다시 한번 반석 위에 올라섰습니다. 우리는 거듭 국민을 실망시키지만, 국민은 결코 실망하지 않고 거듭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는 걸 지난 보궐 선거에서 또 보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는 그때처럼 외롭지 않지만, 사람이 많으니까 배를 끌고 산으로 올라가자고 할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나는 국민도 믿지만, 동지들도 믿습니다. 기어코 해내리라는 것을.
아무도 원치 않고, 아무도 기대하지 않던 독일 통일을 아무도 못 막았습니다. 역사의 힘이자, 민중의 힘 앞에서 정치지도자들은 복종할 길밖에 별도리가 없지 않습니까? 우리도 역사에 꽉 잡혀 통일의 문 앞에 서 있습니다. 야권 통합 운동도 통일의 문을 삐걱 열고 들어가는 일입니다. 이 자리에서 손을 못 잡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양보를 해봐야 주머닛돈이 쌈짓돈인데, 양보 못 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건투를 빕니다.
늦봄 익환
민주화 운동의 동지인 김관석 목사에게 야권 통합 운동을 통일 운동의 예행연습으로 해 줄 것을 당부하는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