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사랑에서 만난 허준과 문익환

당신께

 

그저께 토요일 당신의 정성이 담긴 글발 156 ~160 신이 들어와서 한 주일의 회포라도 푼 것 같은 심정이었다오. 나의 오늘 편지가 75신이니까, 나는 당신 편지 두 장에 한 장꼴도 못 쓰는 형편이군요, 어차피 난 당신 편지 빚은 벗을 길이 없지만요.

오늘 새벽에는 어머님 돌아가신 후 처음으로 꿈에 뵈었어요. 어느 교회에 내가 강연하러 갔는데, 어머님도 같이 가셨어요. 걷지 못하셔서 내가 부축해서 교회 맨 앞자리에 앉혀 드렸는데, 그 자리가 일어서서 아들의 변호를 쩌릉쩌릉하게 하시던 법정 같은 자리였거든요. 몸의 무게를 하나도 느낄 수 없는, 마음의 힘만으로 살아가시던 어머니 그대로였어요.

(김)석중 씨, 그렇게 많은 먹을 걸 넣어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해주시오. 토요일 저녁에는 오랫만에 닭고기를 맛있게 먹었고, 오늘 저녁에는 돼지 고기를 먹어야죠.

건강에 관한 집필을 토요일로 일단락한 셈이고, 오늘부터 다시 정리해서 다듬고 완성하는 단계로 들어가는군요. 축하해 주시오. 역시 쓴다는 건 좋은 일이군요. 막연하던 것들이 뚜렷해졌고,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면을 밝힐 수 있어서 예상밖의 성과를 올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철용 의원은 나를 보면서 허준 생각을 했다지만, 이은성 씨 덕분에 다 허물어진 허준 무덤이 복원될 모양이니, 오랜만에 제사도 받고, 그 후손들도 있을 텐데. 허준이야 모든 출세의 길이 막힌 사람으로 처음부터 의술에 전력투구를 했고, 그것으로 생을 관철한 사람인데, 나야 어디 그 발치에라도 갈 수 없는 사람이지요. 내가 사회정의를 위해 살다가 의술에 눈을 떴다면, 허준은 의술에 전념하다가 사회정의에 눈을 뜨게 된 거니까, 출발점을 달랐는데, 생명 사랑에서 만난 셈이군요.

내가 언젠가 침술에 관한 책을 부탁했는데, 바빠서 잊었난 보죠? 『손발 지압백과』라는 책이 나왔군요. 읽어 보고 싶군요.

안(병무) 박사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네요. 어느 척추가 아픈지? 보나마나 심장과 신경줄로 이어져 있는 척추일 테니까. 파스 몇 군데 붙이도록 그림을 그려 보낼테니 붙여 보도록 하시오. 또 한가지 부탁. 태영이가 폐병으로 각혈까지 한다는데, 메리엔에게 부탁해서 원주 기독병원에 입원 무료 치료를 받도록 했으면 좋겠군요. 세브란스 병원 물리치료실을 찾아서 메리엔을 바꿔 달라면 될 거예요. 원주에 며칠, 서울에 며칠씩 있으면서 일하고 있지요. 며칠 전에 강정애 장로에게서 성탄절 카드가 왔군요. 곧 회신을 올리도록 하겠어요. 

 

당신의 늦봄

1991.11.18 

 

 건강에 관한 집필이 일단락된 것을 기뻐하며 자신이 허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생명 사랑에서 만난 것이라는 생각을 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