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져야 하나가 되고, 하나가 되면 더욱 커진다는 교훈

당신께

 

설 연휴로 나흘이나 편지를 받지도 쓰지도 못하는 나날이었군요. 전에는 한 달에 한 번씩 편지를 썼는데, 그때는 어떠했던가? 얼마나 외로웠을까? 감옥 생활이 그때 비하면, 할만한 것이 되었죠. 어제는 뜻밖에 접견이라고 해서 나가 보았더니, 원주에서 목회하는 서재일 목사 내외가 부모님들께 세배차 왔다가 와서 얼마나 반가웠던지. 생각지도 않은 횡재를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구요.

4일 설날이 입춘인데, 어제 냉수마찰을 해보니까 물이 달라졌더군요. 4일까지는 얼음같이 차던 물이 그리 차지 않게 되었거든요. 절기라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걸 실감할 수 있었어요. 추운 겨울 감방 생활도 또 고비를 넘긴 거죠. 자리에 누우면 온몸의 경락이 여기서 꿈틀, 저기서 찌링, 또 다른 혈에서 벌이 콕 쏘는 듯한 짜릿한 쾌감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길 정도로 건강은 그지없이 쾌조를 달리고 있으니, 감사할밖에. 오늘은 이범영 동지에게로 붓을 돌리려오. 

곧 만날 걸 기대하면서.  당신의 늦봄

 

이범영 동지

 

젊은 동지들이 밖에서 활약하는 소식을 신문에서 읽으면서 민족의 미래는 동지들에게 있다는 흐뭇한 심정을 알리고 싶어서 붓을 들었다오.

늙은이가 감옥에 들어앉아 있는데, 젊은이들이 밖에서 얼마나 송구스러울까? 그런 생각이 들겠지만, 그 점은 안심해 주어요. 나는 많은 젊은이가 감옥에 들어와 있는데, 밖에 있으려면 늘 마음이 괴로웠으니까요. 마음 편한 나날을 보내고 있으니 마음 탁 놓고 할 일들이나 열심히 해 주어요. 나의 건강은 일취월장(日就月將)이라고나 할는지! 나의 건강이 만인의 것이 되도록! 이것이 지금 나의 기도의 중요한 한 토막이니까요.

하나가 되는 것은 더욱 커지는 일이라는 나의 깨달음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알아요? 젊은이들, 학생들에게서 온 거예요. 어른들은 하나 되는 일이 그렇게 힘들어요. 고정관념, 쓸데없는 명분론 등에 사로잡혀, 자그마한 차이도 건너뛰지 못하고 입씨름으로 그 소중한 시간을 다 보낼 때, 젊은이들은 대의명분 앞에서 꽤 큰 차이들도 훌렁훌렁 건너뛰어 하나로 어울리는 모습, 정말 감격스러웠다구요.

커져야 하나가 되고, 하나가 되면 더욱 커진다는 것이 반세기에 걸친 민족 분단사, 민족 수난사가 길이 우리에게 남겨준 귀중한 교훈이라고 나는 생각해요. 우리 민족이 커지는 통일이 한 단계 중요한 고비를 넘어섰어요. 이건 누가 뭐래도 재야 통일 운동의 성과이죠.

그러나 커지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되죠. 속이 알차게 여물어야지요. 그게 바로 민족 자주요, 민주 역량이죠. 그런데, 이 둘은 둘이 아니고 하나죠. 정치, 경제, 사회, 문화면에서 민족 자주를 이룩해내는 일이 그대로 민주화 운동이니까요.

통일 운동은 이제 그 절차를 밟는 건데, 그건 정부에 맡겨야지요. 되돌아서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는 일이야 계속해야지만요. 이제 우리는 통일된 민족 공동체의 속을 영글리는 일, 속살을 탄탄히 채우는 일에 전력을 쏟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것이 곧 민족 자주와 민주화의 성취이죠.

동지의 건강과 슬기와 뜻에 성원을 보내면서 이만 글을 주리려오.  

안동에서 늦봄 문익환

1992.02.06

 

우리 민족이
커지는 통일이 한 단계 중요한 고비를 넘어섰고
, 이제는 민족 자주와 민주화 성취로 속을 알차게 여물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