얌전한 서생이었던 문익환의 변신

당신께

 

어제 편지를 내보내고 김관석 목사 고희 기념 문집을 뒤져 봤더니, 그가 끌려간 것이 75년 4월 3일이었군요. 인혁당 관계 여덟 분이 억울하게 처형되기 엿새 전이었군요.

요란스럽게 떠들어대던 대망의 70년대가 전태일의 분신으로 시작돼서 75년 김상진 군의 할복 자살로 중반에 접어들었죠. 같은 해에 장준하 씨의 죽음이 있었고, 동아·조선 기자 집단 해고 사태가 벌어졌구요.

그때까지 나는 성서 번역에만 몰두해 있었죠. 그것이 나의 필생의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때는 동환이가 인권 운동의 일선에 나서 있었기 때문에 나는 마음 놓고 성서 번역에만 정력과 시간을 쏟으면서도 별로 마음이 괴롭지 않았죠. 게다가 당신이 거의 모든 일에 빠지지 않고 열심히 뛰었기 때문에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거의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고나 할까?

그 시대의 뜨거운 바람이 나를 성서 번역이나 하고 앉아 있을 수 없이 들쑤시고 있었다는 것이 나의 시작에서도 드러나는군요. 감옥에 들어가 있는 박형규 목사를 생각하면서 시 네 편을 쓰지요. 응암동 4월 9일의 절규가 나에게 시 두 편을 쓰게 하지요. 김상진 열사의 죽음이 안타까운 시 한 편을 쓰게 하지요 (후에 징역을 살면서 한 편 더 쓰지요). 장준하 씨의 영전에 시 두 편을 바치지요 (78년 3주기에 또 한 편 바쳤지요).

그해에 내가 한 설교 두 편이 문제가 되는데, 그 하나는 김상진 열사의 죽음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었고, 하나는 장준하 씨의 죽음을 문제 삼은 것이었죠. 김상진 열사의 죽음이 무엇이냐는 걸 밝힌 설교 때문에 중앙정보부에 들어갔었죠. 목요기도회가 중단되었는데, 이를 다시 시작하자는 이야기가 모여서 NCC 인권 위원회 사무실에서 기도회를 다시 시작하는데, 그 설교를 나더러 해달라는 하더군요. 그 교섭을 한 것이 지금은 고인이 된 최승국 군이었다오. 목요기도회에서 타오르는 저항의 불길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하고 이를 꺼버린 건데, 이것이 다시 타오르는 걸 묵과할 박 정권이 아니었죠.

게다가 설교 내용이 산불처럼 번져 나갈까 봐 정부가 안절부절못하는 김상진 열사의 죽음에 관한 것이니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그 설교는 민주당 화보에 실렸지요). 아무튼 그렇게 중단되었던 목요기도회가 다시 살아났지요. 2박3일 조사받고 나오니까, 교계가 발칵 했더군요. 문동환이는 과격하지만, 문익환이는 얌전한 사람인데, 그 얌전한 사람을 데려가다니 했다고 하더군요. 그때까지 나의 풍모는 얌전한 서생이었죠.

장준하 씨의 죽음을 문제삼은 나의 설교 ‘믿음은 희망이다’는 연세대 강당에서 학생들에게 한 설교였죠. 연대 가을 신앙 강조 주간 설교였죠. 전교생이 나의 설교를 두 번 듣게 되어 있었지요. 두 번째 날은 ‘사랑은 희망이다’로 예고되어 있었지요. 오전에 설교 두 번 하고 교목실장이셨던 지동식 목사와 같이 점심을 먹는데, 경찰이 들이닥친다는 전갈이 와서 서둘러 떠났지요. 내일 예정된 설교는 어떻게 하나? 의외로 학교가 강경하게 버티더군요. 이건 신앙의 자유의 침해다, 학원 자유의 침해다 하면서. 그래서 다음날 설교를 준비하고 있는데, 밤중에 교무실에서 전화가 오더군요. 정부의 압력에 학교가 물러섰죠.

1992. 2. 14.

 

 시대 상황이
성서 번역이나 하고 있을 수 없게 만들어 쓰게 된 시와
, 김상진과 장준하의 죽음에 관한 설교를 했다가
문제가 된 일 등을 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