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침묵기에 민족사의 미래를 제대로 바로 말한 사람들이 있었다

당신께!

 

이번 평양에서 열렸던 제5차 고위급회담은 온 겨레가 기대하는 것을 흡족히 채워 주어서 정말 경사가 났다고 해야겠군요. 이제 정말 되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군요. 밖에 있다면 아버지, 어머니 무덤에 가서 큰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군요. “통일은 다 됐어”라는 말을 남기고 가신 어머님의 눈이 역사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셨죠.

또 하나 경사가 터졌군요. 동계 올림픽에서 김명윤 선수가 1,000m 경기에서 은메달을 딴 것은 동양인의 몸의 한계를 극복한 일로써 정말 쾌거라고 해야겠군요. 그것도 0.01초 차이라니, 금메달이라고 해도 될 일이죠. 그 질주하는 모습을 TV로나마 볼 수 없다는 게 한스럽군요.

이렇게 밝은 오늘의 경사에서 지난날을 되돌아본다는 것이 특별한 의미가 있지 않아요? 어둡던 일까지 다 밝게 보일 수 있으니까요. 부정적인 일까지 모두 긍정적인 시각에서 다시 평가되게 되는 것이니까요.

장준하 씨의 죽음을 되살리려고 『사상계』 사설을 모아서 인쇄에 부쳤는데, 경찰이 그 낌새를 알아차렸어요. 그리고 그 출판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했어요. 그럴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했더니, 전 경찰력을 동원해서 인쇄소라는 인쇄소를 다 뒤져서 찾아 나섰어요. 죽은 제갈량이 무섭다더니, 죽은 장준하도 무섭기는 무서운 거구나 하는 걸 느끼게 되었죠.

제갈량은 그 신출귀몰한 작전 때문에 무서웠지만, 장준하 씨는 그의 양심, 그의 진실, 그의 정의감, 그의 민족애 때문에 그렇게도 무서운 존재가 되었죠. 그 기세로 보아 그걸 맡아서 조판 중인 인쇄소가 박살이 날 형편이더군요. 그래서 인쇄를 중단하는 수밖에 없었죠.

76년을 맞이하는 나는 온 겨레와 함께 암담하기만 했었죠. 장준하 씨는 죽고 말았고, 동아일보 광고란에서 불타오르던 민의 민주 열망도 동아일보 사주 측의 배신으로 수그러들었고 언론 자유를 수호하려던 기자들은 쫓겨나고, 학원마저 완전 침묵 속에 잠겨 버렸고. 그러나 내게는 성서 번역이라는 나의 생을 건 일이 있어서 그 일에 몰두하는 것으로 암담한 오늘의 역사를 잊으려고 했죠.

성서 번역을 하는 나의 방에는 장준하 씨의 큰 사진이 액자에 담겨 걸려 있었죠. 장례식 때에 쓰려고 현상해 둔 것을 한 장 가져왔던 거죠. 2월 들어선 어느 날, 달력의 3월 1일이 빨간 글씨로 나의 눈을 콕 쏘았어요. “3·1운동 68주년이구나. 이 시점에서 준하 네가 살았다면 뭘 할 거냐?” 나는 그의 훤한 모습을 쳐다보며 물었어요. 때마침 『씨알의 소리』(2월호였겠지요)가 보여 펼쳐 보았더니, 거기 「한국 외교의 나아갈 길」이라는 장준하 씨의 글이 실려 있더군요. 단숨에 읽었지요. 전적으로 공감하면서. ‘아, 여기에 장준하가 이 시점에서 하고 싶은 말들이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내가 할 일이 눈앞에 보였어요. 이 암흑기, 이 침묵기에 민족사의 미래를 제대로 바로 말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기록이라도 남겨야 하겠다는 생각이었죠.

또다시 백기완 씨와 나는 장준하 씨를 매개로 마음과 마음이 통해 있었어요. 만나자고 해서 나갔더니,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 일을 꺼내더군요.

1992. 2. 21.

 

 장준하의 글을
모아 출판하려던 계획이 무산된 일과 삼일절
68주년을 앞두고 그의 『한국 외교의 나아갈 길』이라는 글을
읽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았던 일을 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