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자와 예수의 하느님은 똑같은 유일신

당신께

 

“뜨거운 마음 바람에 실어 숨 막힌 이 땅에 보내노라.”1978년 두 번째로 서울구치소에 갇혔을 때였지요. 12월 28일 대통령 취임식 날 많이 풀려나리라고 기대하고 있다가 못 나가게 되는 걸 보면서 밖에서 어머니들이 머리를 동이고 몸져누운 모습이 눈앞에 선히 보이더군요.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아 시작한 단식이었지요. 그래서 병사로 옮겨졌는데, 거기서 문득 당신의 뜨거운 마음이 생각나서 지은 찬송가지요. 

당신의 일흔세 번째 생일도 옆에서 축하해 줄 수 없어 저번 달 접견실에서 그 찬송을 불렀죠. 오늘 하루 그 노래 부르는 나의 목소리나 들으며 지내라고. 또 구인장이 날아와서 안기부 지하실에 가 앉아 있는지도 모르지만. 거기서라고 내 목소리가 안 들릴 까닭이 없지요. 그런 일은 없기를 빌겠소. 오늘 며느리들, 딸이 정성껏 장만한 생일잔치가 즐거운 잔치가 되기를 온종일 빌리다.

반년을 살고 과부가 될 각오로 시집온 건데, 48년을 넘게 행복하게 살았고, 나는 지금 날로 젊어져 가고 있으니, 일흔세 해가 몽땅 하느님의 축복이죠. 오늘은 이만. 당신의 뜨거운 사랑 늦봄

1992. 10. 24.

 

 

기세춘 선생님께

 

묵자, 석가여래, 예수가 한 그루에서 뻗은 세 가지라는 걸 찾게 해주셨으니 제가 선생님께 뭐라고 감사한 말을 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셋의 공통점이 바로 평등이죠.

 그런데 그 셋 가운데서 묵자는 석가여래보다는 예수와 훨씬 더 가깝군요. 어제 편지에서 그 두 사람을 쌍둥이 같다고 썼던가요? 묵자와 예수가 석가여래와 다른 점은 신관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석가여래에게서는 인격이 해소되고 마는데 묵자나 예수에게 있어서는 인격이 강조되는군요. 석가의 종교에 있어서 신은 철저하게 내재화되지요. 불교에서는 그걸 ‘불심’이라고 하지만 말입니다.

선생님이 지적하신 대로 묵자는 하느님을 평등, 곧 정의를 원하시는 움직일 수 없는 뜻을 가지신 인격으로 보는군요. 창조주라는 말은 없어도 “털끝 하나라도 하느님이 하신 일 아닌 것이 없다”는 말에서 그가 하느님을 창조주로 믿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천하를 평등하게 사랑하시고, 만물이 서로서로 자라게 하여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묵자의 말은 그가 하느님을 세계를 주재하시는 분으로 믿었다는 것도 확실합니다〔今決天兼天下而愛之 邀遂萬物而利之 若毫之 末非天之所爲也(『墨子』, 天志中篇) — 편집자주〕.

하느님이 유일 무이시다는 말은 안 했지만, 이상의 말에서 그가 유일신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선생님의 주장에도 전적으로 동의하겠습니다. 중국에서 나서 중국의 문물을 배우며 자라고 그 울타리 안에서 사고한 묵자의 신관이 선생님이 지적하신 대로 어떻게 중국의 공맹이나 노장의 신관과는 다른 신관을 가졌을까? 수만 리 떨어져 있는 히브리인들의 신관과 이렇게도 같은 신관을 가지고, 그 확신을 가지고 생을 관철해서 살 수 있었을까?

하늘의 법도(천륜과 인륜을 일관하는)를 말하는 ‘천(天)’이라는 말을 쓰면서도 묵자는 어떻게 히브리인들이 믿는 인격신을 믿었을까? 같은 뿌리에서 나온 두 가지이기 때문이라는 설명밖에 다른 설명이 있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예수도 셈족의 신 이름을 쓰면서도 실은 셈족의 신관과는 동떨어진 하느님을 믿고 있었다는 말을 이제 자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모세의 신 야훼는 결코 유일신이 아니었습니다.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나 말고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은 다른 신의 존재가 인정되어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학자들은 모세의 신앙은 ‘단일신’신앙이었다고 하죠. 세상에 신이 많아도 너희는 너희를 구해 준 나 야훼만을 섬겨야 한다는 거였으니까요. 그걸 학자들은 배일(拜一) 신앙이라고도 말합니다.

1992. 10. 24

 

 본문에 사용된 편집자주는 단행본 『예수와 묵자』의 편집자 주를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