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신은 수메르 전통

당신께

 

어제는 여기 교도소 교도관들 운동회가 있어서 임시 휴일이 되는 바람에 편지를 하루 걸렀지요. 장도 없는 그곳에서 쓴 당신의 편지 503신까지 들어왔어요. 당신이야말로 모든 일을 당당히 겪어내겠지만 이 마음을 무엇으로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군요. 

오늘 하늘로 들려 올라갈 걸 잔뜩 기다리고 몸과 마음, 그리고 온 재산까지 바쳐온 사람들이 오늘을 지나고 겪을 허탈감은 어떤 것일까요? 87년 대선 뒤에 우리가 느꼈던 허탈감은 거기 비하면 약과일 텐데.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기를 치는 놈들, 천벌 받을 놈들이지요. 자기 최면에 걸려 스스로도 속았다면, 동정이라고 받을 수 있을 텐데, 이건 그것도 아니니. 지옥에 가도 맨 밑바닥으로 가야 할 놈들이지요. 하기야 이런 극단적인 탈선을 하지 않으면서 적당한 선에서 존경을 잃지 않으면서 교인들을 그럴싸하게 속이는 종교인들이 더 무서운지도 모르죠. 모든 종교인이 하느님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고 신도들을 속이고 있지나 않은지, 철저한 반성을 해야지요. 물론 나부터.

당신의 사랑. 늦봄 

 

 

기세춘 선생님께

 

모세의 신앙이 유일신 신앙이 아니라 단일신 신앙이었다는 것은 저번 편지에 쓴 거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만난 신앙의 세계는 어떤 것이었는가? 당시 가나안의 만신전에는 신이 70여 명 있었거든요. 70여 신들 가운데서 우두머리가 ‘바알’ 이었습니다.

“나밖에 다른 신은 없다”(사 46:21)는 야훼의 주장은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십계명의 신앙과는 다르지요. 이같은 유일신 신앙을 천명한 것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였습니다. 이 야훼의 주장을 대신 전한 이사야는 주전 7세기의 예루살렘 예언자가 아니라 주전 5세기에 바벨론에서 예언한 이사야입니다. 묵자와 동시대 사람이지요.

바벨론에도 신은 많았지요. 주신(主神)은 마르둑이었구요. 어떻게 그 강대국들의 신들을 제쳐놓고 약소민족 이스라엘의 신 야훼가 그런 주장을 할 수 있었을까요? 에집트에서 종살이하는 노예들을 해방시켜 주고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는 천덕꾸러기들을 해방시켜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는 신만이 ‘참’신이라는 깨달음에서 이런 유일신 고백이 나올 수 있었죠. 그 신 앞에서 권력의 후광이나 되어주는 신들은 참된 신일 수가 없다는 깨달음이죠. 이 ‘참’신 신앙이 유일신 신앙의 뿌리입니다. 

그런데 이 둘째 이사야의 입을 통해서 표명된 유일신 신앙이 수메르 문화의 본고장이었던 곳에서 처음으로 명확하게 고백 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군요. 생각이 여기 미치자, 시베리아에는 원시적인 유일신 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다는 학설을 내세운 Schmidt라는 가톨릭 종교학자가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그는 너무 기독교적인 신관의 시각에서 시베리아 종교를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한 것이 아닌가 해서 별로 탐탁스럽게 생각지 않았는데, 이제 그의 연구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 같군요. 시베리아야말로 우리 선조들이 중앙아시아에서 이리로 이동해 오던 곳 아닙니까? 목자의 유일신 신앙이 이런 흐름을 이어받아 가지고 있었던 거라고 확신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묵자와 예수는 이런 큰 정신사적인 같은 흐름에서 솟아난 두 큰 봉우리라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영향을 주고받는 것보다 더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친근감을 볼 수 있으니까요.

기 선생님이 예수와 묵자의 다른 점이라고 지적하신 점들도 제가 보기에는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사상은 쌍둥이 같다고 했던 겁니다.

 

1992. 10.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