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자와 예수는 계급해방론자

은숙에게

 

너무 바빠서 시아버지 보러 오지 못하는 걸 마음에 둘 것 없다. 나는 너나 호근이가 정신없이 바쁜 삶을 사는 게 그리도 보기 좋으니까. 할 일 없이 빈둥빈둥 놀면서 밥이나 축내는 사람들이 세상엔 얼마나 많으냐? 바쁘게 살아도 남의 삶을 살 뿐, 제 삶을 못 사는 사람 또한 얼마나 많으냐? 그런 사람이 대부분이겠지. 그런데 너희 내외는 힘들기는 해도 제가 하고 싶은 일에 신명을 바쳐서 정신없이 살아가고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다음번 오면 나의 젊어진 목소리를 들려주지. 이 나이에 젊은 목소리가 돌아올 수 있으니까, 너의 성악도 곧 전성기를 넘지 않나 초조해할 것 없다. 날이 갈수록 성숙해 갈 뿐이지. 그렇게 바쁘면서도 부르는 노래가 늘 새로워 사람들을 기쁘게 해준다는 게 어디 예삿일이냐? 달리는 말에 채찍질이라고, 한마디 할까? 정말 타성에 빠지지 말라고. 언제나 첫사랑에 빠지듯 노래를 사랑해야지. 노래에 담겨 있는 인생을 사랑해야지. 그 사랑으로 청중들에게 인생의 새로움을 아름답게 느끼게 해주어야지, 노래를 부르려고 사람들 앞에 나설 때마다. 보고 싶다.  안동에서 애비 씀

1992. 10. 30. 

 

기세춘 선생님께

 

선생님이 생각하듯이 묵자는 예수보다는 에세네파와 가까운 게 아닙니다. 에세네파는 예루살렘 특권층인 사제 계급이었습니다. 거기서 친로마 사제파에게 밀려났으니까 반로마적임에는 틀림없지요. 그러나 그들은 율법으로 민족해방을 이룩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본래는 평등을 지향하는 것이었지만, 유대교에 와서는 율법은 평등을 배신하고 있었거든요. 그 대표적인 것이 안식일 계명입니다.

안식일 계명은 본래 일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휴식을 주려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 안식일은 그림의 떡이었죠. 그래서 안식일을 못 지키면 죄인이 되었습니다. 당시의 민중은 율법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했습니다. 민중에게 굴레를 씌워 끌고 가는 지배자의 이데올로기가 유대교의 율법이었으니까요.

로마에 적극적인 항거를 한 것은 젤롯파였지요. 무력항쟁으로 유대를 로마의 기반에서 벗어나게 하자는 것이었지요. 요새 말로 민족자주 민족 해방운동이었습니다. NL이죠. 그런데 그들은 예루살렘의 친로마 특권층과 민중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사회적인 내부 모순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예루살렘 특권층과 민중 사이의 문제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계급모순의 타파에 그의 모든 관심이 쏠려 있었습니다. 요새 말로 하면 예수는 PD 계열이지요. 그런데 예수는 그 계급모순을 혁명으로 타파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마카비가의 실패를 그는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의 관심은 민중의 의식화에 있었다고 보입니다. 배고픈 서러움을 겪어 아는 사람만이 남의 배고픈 서러움을 알아주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그는 알았고, 이 마음만이 새 공동체를 묶어 나가는 힘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예수는 이것을 바벨론의 이사야에게서 배웠던 것 같습니다(사 53장).

1992. 10.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