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 옥중서신 제328신

 

당신께

어제 운동 시간에 맨발로 땅을 밟아 보니, 땅이 싸늘하게 식어 버렸더군요. 29일까지 따뜻하던 땅이 30일엔 싸늘해졌으니,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경계선이었죠.
내년 임금 인상을 3% 선에 억제하겠다는 정부의 발표를 보면서 의아하던 마음이 쌀 수매가를 5%만 올리겠다는 정부의 발표를 보면서 풀리는군요. 대선을 앞두고 공무원, 노동자, 농민에게 미움받을 일을 떠나갈 정부가 떠맡음으로 간접적으로 민자당을 돕겠다는 정부의 의도가 표출되었죠. 교묘한 관권 개입이군요.
이번 『말』지에 한빛교회 출신 조인영 여목사의 기사가 실려있군요. 인천에서 민중 목회하느라고 고생이 막심한가 본데, 모교회가 자매 관계를 맺고 도와주었으면 싶군요. 한빛교회가 잃었던 민중과의 접촉을 회복하는 것도 좋겠군요.
내일 한빛교회로 날아가서 당신 옆에 앉아 예배 드릴게요. 
은숙이를 기다리며.  당신의 사랑 늦봄


기세춘 선생님께

만왕의 왕 메시아는 높은 권좌에 앉아 세도를 부리며 영광을 누리는 자가 아니라, 고생하는 민중 속에서 민중과 함께, 민중을 대신해서 고난을 겪는 야훼의 종이라는 메시아 신앙을 예수는 바빌론의 이사야에게서 받았습니다. 굶는 서러움을 겪어 보았기 때문에 남의 배고픈 서러움을 아는 마음이 곧 메시아 의식이었죠. 예수는 그 메시아 의식을 민족 속에서 일깨우려고 했습니다. 그들 속에만 있는 그 마음이 메시아의 마음, 인류를 구할 수 있는 마음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려고 죽기까지 했습니다. 민중을 구원의 대상으로 본 것이 아니라, 구원의 주체로 보았죠.
하늘나라가 너희 것이라는 말씀이 바로 그 사상을 말하는 겁니다. 하늘나라가 너희 것이 되었다고 해서 지배자가 돼서는 안 돼, 끝까지 사랑으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해, 라는 것도 거듭 강조하지요. 왕은 지배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라는 겁니다. 폭군이 또 다른 폭군으로 바뀌는데 지나지 않는 혁명의 악순환을 그는 맥가비 일가의 운명에서 뚜렷이 보았죠
예수는 모든 일에 앞서 민중의 의식화가 앞서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그 동시에 그는 로마의 지배자와 예루살렘 지배자들의 의식화 또한 필요하다고 보았죠. 또 가장 악질 친 로마 세력은 세리들이었죠. 그들과 같이 밥을 먹으면서 그들의 의식화에 힘을 쏟았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과도 가슴을 열고 만났습니다. 
예수님 꽤 순진하다고 생각되시죠? 그런데 그게 가능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도 가장 위대한 바리새인 지도자 가말리엘이 의식화된 것 아닙니까? 그의 제자 바울이 아니었더면, 기독교는 유대교회 한 종파가 되고 말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로마가 의식화되는 데는 삼백 년 세월이 걸려야 했습니다. 콘스탄틴은 기독교인과 손을 잡아야 대권을 잡고 이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불행하게도 삼백 년 후의 예수의 제자들은 권력의 맛에 흠뻑 빠져버렸죠. 예수를 배신하고 말았습니다. 
1992.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