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께
오늘은 기다림이 시작되는 날. 앞산 단풍을 완전히 뒤덮은 안개, 아직도 안 걷히고 있군요. 어제 한빛교회에서는 유 목사님이 어떤 설교를 하셨는지 몰라도 나의 명상은 에베소서 3장 20절.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면서 우리가 바라거나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베풀어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 말씀은 내게는 실감이 나는 말씀이군요. 하느님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것은 정말 내가 바란 것보다 ‘훨씬 더’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나는 빚진 죄인이 되죠. 세상에는 온갖 불행을 밥 먹듯 물 마시듯 하면서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사람 천지니까요. 하느님께 진 빚을 사람들에게 갚아 주는 것이 나의 삶일 텐데, 그게 턱도 안 닿는 일이니, 하느님께, 사람들에게 죄인이 될 수밖에 없죠. 이 사랑의 빚만은 벗어 버리지 말고 지고 가라고 한 바울의 말대로 죽기 아니면 뻗기로 살아가야지요. 당신의 사랑
기세춘 선생님께
『신학 사상』 1992년 가을호를 구해서 안병무 박사의 논문 「마태오의 민중적 민족주의」를 한번 읽어 보세요. 기막힌 연구입니다. 그는 마가복음에서 예수를 민중 속의 민중으로 발견한 사람입니다. 이제 마태복음에서 의식화된 민중을 발견해 주었군요.
예수가 민중의 의식화뿐만 아니라 예루살렘과 로마의 지배의 의식화에까지 관심이 있었다는 말을 지난 토요일 썼습니다. 이것은 그냥 전략 전술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신앙, 그의 세계관이 그의 관심을 그쪽으로까지 돌리게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믿는 하느님은 유대인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온 인류의 하느님이셨습니다. 착한 사람들에게만 햇빛을 비추시고 비를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악인들에게도 골고루 햇빛을 비추시고 단비를 내리시는 하느님이셨습니다. 만인에게 평등한 묵자의 하느님과 예수의 하느님은 이렇게 같군요.
원수를 사랑하는 예수의 말씀을 이런 문맥에서 이해하면 될 것 아닐까요? 도대체 그에게는 원수가 없었죠. 민중을 사랑하는 뜨거움이 높을수록 그만큼 민중을 억압하는 세력을 뜨겁게 미워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억압자들을 미워하지 않으면서 억압당하는 민중을 사랑한다는 것은 관념의 유희라고 생각되지 않으세요? 그런데 그것이 예수에게서는 관념의 유희가 아니고 목숨을 내건 전력투구였습니다. 억압자들을 미워하지 않고 한 형제로 생각하고 의식화시키는 것이 민중을 사랑하는 길이었습니다. 적어도 예수에게는 그랬습니다.
예수의 하느님은 질투하는 모세의 하느님과는 다른 차원의 하느님이었습니다. 질투하는 하느님은 억압자들을 미워하는 신이었으니까요. 종살이하는 것들을 일껏 건져 주어서 자유롭게 잘 살게 해주었는데 억압자의 신을 모시고 억압자로 둔갑해 버리는 것을 모세의 하느님 야훼는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죠. 그의 질투는 배신하는 이스라엘 위에 무서운 진노로 떨어졌습니다.
1992. 1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