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의 하느님과 아버지 하느님은 같다

당신께

 

죄가 많은 곳에 은혜도 많다고 바울은 말했지만, 나는 은혜가 많은 곳에 죄도 많다는 말을 해야 할 것 같군요. 하느님의 은혜가 크면 클수록 나는 큰 죄인이 되니까요. 그러나 이런 생각도 퍽 개인적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나는 어쩌면 침몰되어 가는 배 위에서 만화를 즐기는 사람이 아닐까요?

나에게 내려 주신 은총을 진정 감사할 수 있으려면 침몰되어 가는 배를 구하는 일이 필수가 아닐까요? 모든 사람이 같이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일이 필수라는 말이죠. 그게 우리에게 민주화요 통일이죠. 이것이 이루어져야 나는 큰 소리로 하느님께 감사할 수 있게 되죠.

우리는 그동안 민주화와 통일에 열을 올리다 보니 그것만 되면 다 될 것처럼 착각을 일으켰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군요. 그것은 어디까지나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행복의 조건에 지나지 않죠. 조건이 갖추어진다고 해서 모두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죠.

이번 『말』지에 「우리 시대의 진보란 무엇인가?」라는 박형준 님의 훌륭한 글이 실렸는데, 결론부에 가서 “해방의 정치”에서 이제 “생활의 정치”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탁견을 피력했군요. “해방의 정치”에는 눈을 아주 돌리자는 것이 아니죠. 둘이 동시에 추진돼야 한다는 말이죠. 해방의 정치로 조건을 만들어 가면서 생활의 정치로 꽃을 피워 가야 한다는 말이죠. 나도 그걸 느끼고 있었나 봐요. 나의 시가 요새는 생활 시로 바뀌어 가고 있으니. 이만.  당신의 늦봄

 

 

기세춘 선생님께

 

어제 나의 글을 읽으시고는 ‘질투하는 신’이라는 말 때문에 유목민의 신 야훼에 대해서 사람들은 엄청난 편견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아시게 되셨지요? 선생님은 “묵자의 이상 사회인 우 임금의 평등 사회 군장이신 하느님이 유목민의 신과 같은 절대 지배자가 아니었으며 모든 인민의 아버지였다”고 하셨군요.

묵자뿐 아니라 공맹까지도 이상 사회로 보았던 요순시대나 우 임금 시대는 유목민 전통이 살아 있던 시대가 아닙니까? 유목민 문화가 농경 문화에 밀려나게 되지요. 그런데 묵자는 그 유목민의 평등을 고집하다가 부와 권력의 편중이 심화되어 가는 농경 사회에서 고립되어 박해를 받게 된 것 아닙니까?

묵자의 하느님이 인민의 아버지였다면, 예수의 하느님은 더욱 아버지였습니다. 예수가 가르쳐 준 기도에는 하느님이라는 말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아버지’지요.

묵자와는 달리 예수는 하느님의 심판을 말하지요. 예수의 하느님은 당신을 믿지 않고 당신과 맺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가차 없는 심판을 내리시는 하느님이셨죠. 그런데 그 약속이란 것이 십계명이거든요. 십계명은 계율이기 전에 인권 헌장입니다. 약자의 인권을 유린하지 않고 존중한다는 것이 새 공동체의 생활 규범이었죠. 그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을 용납하실 수 없는 신이 모세의 신이요, 예수의 신이었습니다. 그 심판은 하느님 자신의 권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약자의 인권을 위한 질투요 진노요 심판이었습니다.

묵자가 신의 심판을 말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예수와 달랐지만, 그의 사상의 골격은 예수와 너무 같다고 하겠습니다. 기 선생님께는 예수가 묵자와 너무나 같다고 말해야겠지요?

1992. 11.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