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께
성서 공회가 주기도문 새 번역에 대한 나의 의견을 그렇게 기다린다고 해서 어제는 민 박사에게 편지를 썼어요. 복사해서 보내 달라고 요청해 보구려.
그저께는, 여기 식으로 아래는 (그저께의 경상도 사투리), 나의 감사가 진정 감사가 되려면, 그것이 민족의 감사로 확산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쓴 것 같군요. 그러나 민족의 감사로 확산되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세계의 산업화와 함께 지구촌이 몽땅 생명에 위협을 받는 때, 우리 민족의 문제인들 위협받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요새 박 박사의 “통일신학의 여정”을 읽고 있는데, 모든 민족의 민족사적인 과제는 예외 없이 세계사적인 과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군요. 오랜만에 조직 신학자의 글을 읽으니까 새로 깨우침을 받는 점이 많군요. 기세춘 씨에게 쓰는 글이 끝나면 박 박사에게 몇 번 써야 할 것 같군요.
미국은 오랜만에 정권 교체를 해냈는데. 그러나 클린턴이 이끄는 미국은 한국 경제에는 상당한 부담을 안겨줄 것이라니, 걱정이군요. 당신의 사랑 늦봄
기세춘 선생님!
기 선생님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예수와 묵자는 그 바탕이 같다는 이야기를 꽤 장황하게 썼습니다. 기 선생님이 차이점이라고 지적한 것도 사실은 그 바탕은 다르지 않다는 걸 밝히려고 했습니다.
“묵자에게는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 의(義)였으나 예수에게는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었다”는 선생님의 판단은 아무래도 적잖이 편견에 치우친 것 같습니다. 예수가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있어서 의(義)란 천하를 주고도 못 바꾸는 생명을 짓밟는 일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그것은 생명 사랑에서 터져 나오는 분노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의와 생명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도 묵자와 같다. 다만 예수는 ‘목숨보다 의 가귀한 것’임을 말하지 않는다 — 편집자주).
예수는 사랑보다는 의를 더욱 강조했습니다. 예수를 사랑으로 본 것은 제4복음서 저자입니다. 새 공동체의 주인공들이 갖추어야 할 자질 여덟 가지 (마태복음 5장, 소위 8복)에서도 예수는 사랑보다는 의를 부각시킵니다. 사랑의 사회적인 실천은 의일 뿐이니까요. 그리고 예수는 그 의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습니다. 의는 생명을 위한 것이지만, 그 일을 위해서 당신의 생명까지 바쳤습니다.
평화에 관해서도 예수와 묵자는 그 바탕이 하나군요. 묵자가 전쟁을 막기 위해서 동분서주한 모습은 거룩하기조차 하군요. 평화주의자에 멎지 않는 평화 실천가 묵자를 기 선생은 저에게 발견하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에게도 평화가 궁극적인 목표였습니다. 예수의 복음은 평화의 복음이었거든요. 그가 제시한 새 공동체는 정의가 기둥으로 떠받치는 평화의 왕국이었거든요. 그런데 예수에게 평화는 그냥 전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평등은 모든 선하고 아름답고 참된 것의 총화였습니다. 그의 복음을 평화의 복음이라고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1992. 11. 5.
본문에 사용된 편집자주는 단행본 『예수와 묵자』의 편집자 주를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