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년 15897날, 늘 새로움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게 해준 당신

우리 봄길님

 

계절을 따라 바뀌는 한빛교회 주보 표지 판화는 늘 좋지만, 이번 새해를 맞아 선보인 판화는 정말 좋네요. 돋아나는 새싹들, 번져 가는 생명의 물결 ─ 정말 정교하군요. 판화 작가들이 흑백을 뒤바꾸어 표현해 내는 그 감각이 놀랍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예배 시간에 그 판화 작가에게 뜨거운 박수를 쳐 드렸으면 좋겠군요. 나의 특청이니까. 꼭, 꼭, 꼭.

새로 온 준목은 배태진 목사의 동생 아닌가요? 배광진은 아무래도 배태진 목사와 형제간 같군요. 차풍길 집사의 이름을 예배위원 이름들 속에서 발견하는 감격만으로도 주보는 예사로이 보아 넘길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려 징역을 살다가 가정의 품으로 돌아온 그 아픔, 민족의 아픔이 주보에서 찡 가슴에 울려오네요. 암으로 다 죽는 줄 알았던 윤정진의 이름을 예배위원 이름들 속에서 발견하는 것도 정말 감격스러운 기쁨이구요. 정진이 교회 뜨락에 있으면서도 예배에 안 나온다고 안계희 전도사 몹시도 가슴을 앓았건만, 지금은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기쁘게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그 엄마 안 장로 얼마나 기쁘고 대견스러울지. 나의 축하를 전해 주시오. 안창도 집사의 반가운 이름도 보이네요. 안창도 집사 내외를 내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그 경위를 당신한테 이야기했던가 몰라.

어느 주일날 한빛교회로 낯선 젊은 청년 한 쌍이 나를 찾아왔지요. 이야기하고 싶은 일이 있다며, 어느 다방으로 나를 안내해 가지고 가서 하는 말이 자기들의 결혼 주례를 서달라고 하더군요. 내가 바빠도 보통 바쁜 사람이 아닌데, 생판 모르는 사람의 주례까지 서준다는 일은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이었거든요. 그래서 난색을 표했더니, 우리가 철창을 사이에 두고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꿈이 오는 새벽녘』을 우연히 책방에서 만나 사서 읽어 보고는 꼭 나의 주례를 받고 싶어졌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말하는 그 젊은이들의 진지한 모습에 내가 머리를 숙이게 되었죠. 지금도 그때의 그 두 얼굴이 눈만 감으면 환히 보이는군요. 인연치고는 아름다운 인연이었죠. 언제 보아도 그 내외는 변함없는 한결같은 사랑으로, 깨끗하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걸 알 수 있지요.

그 부부의 진실한 행복 앞에서 나도 행복을 느끼거든요. 그 행복의 근원은 물론 당신이구요. 어쩌면 그들 부부도 우리를 쳐다보면서 행복을 느끼는지도 모르지만요. 당신은 나에게 엄청난 축복이지만, 그 젊은 부부도 나에겐 커다란 축복이라고 해야겠지요.

지난번 나갔을 때, 한신대 출신 젊은 목사가 꼭 나에게 결혼 주례를 받고 싶다고 여러 번 간청하는 걸 해주지 못한 일이 있는데,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안됐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얼마나 섭섭했을까? 지금이라도 초청해서 저녁을 대접하면서 기도해 주었으면 싶은데, 알 길이 없군요.

안상님의 딸 결혼 청첩장 표지에 “하나가 되는 것은 더욱 커지는 일입니다”가 커다랗게 쓰여 있군요. 통일되는 것은 이 겨레가 커지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한 말인데, 그게 두 젊은이가 한 가정을 이루는 데도 의미 있는 말이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 못 했군요.

그러고 보면 우리도 한 가정을 이루어 1년이 모자라는 50년을 살았는데, 우리도 꽤 커졌다고 생각되지 않아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나는 당신을 만나 엄청나게 커졌다고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말할 수 있을 것 같군요.

49년이면 15,897일인데 그 많은 나날, 늘 새로움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준 당신의 하냥 젊은 마음이 나를 늙지 않고 계속 자라게 해주었죠. 그러니 나같이 복받은 사람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어요? 그같이 복된 하루가 오늘 또 하나 쌓이는군요. 당신의 편지에 날아 들어오는 늘 새로운 마음이 하루하루 나를 젊게, 복에 겨워 살게 하죠. 기다림이라는 게 인생에 힘찬 긴장감을 준다는 거 요새 새삼 느끼는군요. 모레 만날 걸 기다리며.  당신의 사랑 늦봄

1993. 2. 10.